매일신문

[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시부문 당선작]사과를 깎는 시간

사과를 깎는 시간

심 상 숙

사과를 깎습니다

둘레를 깎습니다

붉은 껍질은 꽃이 흔들리며 망설였던 거리입니다

피울까 말까, 시간의 굴레가 영글었습니다

씨앗의 일가들이 칼날을 지나 흩어집니다

푸른 그림자 속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사과를 깎습니다

우리의 둘레를 깎습니다

향기는 공감각적 두께로 앉은 벌레소리입니다

잎사귀 사이로 내린 별빛이 고스란히 부서집니다

대롱거리던 표정과 비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린 시간이 잘립니다

사각사각 일가들은 잘도 헤어집니다

사과를 깎습니다

귀에 익은 발자국 하나가 멀어집니다

칼날이 스쳐간 자국, 그 아래로

멍의 둘레를 따라 나는 고요히 걸어 내려가 봅니다

아주 사소한 이파리 하나가 붉어가는 사과의 볼 위로 나볏이 스쳐 내린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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