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고(故)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숨진 사실이 거듭 확인됐다.
차벽 설치와 살수 행위 등 당시 경찰의 집회시위 대응 전반에 문제가 있었을 뿐 아니라 경찰과 청와대가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백 농민의 치료 과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수술과정에도 개입한 정황도 드러났다.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는 21일 이 같은 내용의 '고(故)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재발방지와 인권 증진을 위한 제도 개선을 경찰청에 권고했다.
백 농민은 2015년 11월 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가했다가 물대포에 맞아 중태에 빠진 뒤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다. 뇌수술을 받은 백 농민은 연명치료를 받다 이듬해 9월 25일 숨졌다.
진상조사위에 따르면 백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뒤 병원에 옮겨졌을 당시 의료진은 수술을 하더라도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당시 혜화경찰서장은 서울대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신경외과 전문의가 수술을 집도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실도 서울대병원에 전화를 걸어 백 농민의 상태를 문의하자 서울대병원장은 백선하 교수에게 '피해자 상황을 확인하고 적절한 조처를 하라'고 지시했다.
백 교수는 백 농민에게 사망진단을 내리며 사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기재해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다만 청와대나 경찰이 서울대병원에 연락을 취하며 백 교수를 특정해서 수술을 집도하도록 요청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진상조사위는 전했다.
사건 당일 오후 10시 30분께 병원에 도착한 백 교수는 가족들에게 수술을 권유해 이튿날 오전 0시 10분부터 약 세 시간 동안 수술을 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백 교수가 수술을 집도하게 된 데에는 의료적 동기만이 작동하지는 않았을 것이 진상조사위의 판단이다. 유남영 진상조사위원장은 "물론 사람을 살리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백 농민이 당시 사망하면 급박한 상황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진상조사위는 또 경찰이 백 농민에 대한 부검 영장을 발부받기 위해 '빨간 우의' 가격설을 이용한 것으로 봤다.
'빨간 우의'는 백 농민이 쓰러질 당시 촬영된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로, 일간베스트 등 극우 성향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백 농민이 '빨간 우의'에 폭행당해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찰은 백 농민이 2016년 9월 숨지자 부검으로 사인을 밝히겠다며 '빨간 우의' 가격설을 영장 신청 사유로 적시했다.
하지만 경찰은 백 농민이 집회 현장에서 쓰러진 직후 '빨간 우의'의 신원을 확인해 폭행 혐의를 조사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그를 2016년 3월 일반교통방해 등의 혐의를 적용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진상조사위는 밝혔다.
하지만 경찰이 '빨간 우의' 가격설에 대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음에도 이를 근거로 부검 영장을 신청하고,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반발에도 무리하게 영장 집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경찰의 대응은 의문을 낳는다.
이에 대해 경찰은 빨간 우의 가격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였다고 진상조사위에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진상조사위는 경찰의 집회시위 관리방침을 비롯해 경비계획, 경력동원과 차벽 설치, 살수 행위까지 모든 과정에서 인권침해 요소가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유 위원장은 "백남기 농민 사건은 한 마디로 국민의 자산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경찰이 국민의 봉사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나쁜 선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케이스"라고 꼬집었다.
당시 경찰은 청와대 경호구역에 대한 시위대 진입을 막기 위해 현장경찰관에게 차단선을 절대 방어할 것을 주문했으며 지하철 광화문역에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지나도록 하는 등 봉쇄 작전을 진행했다. 필요한 공권력이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 행사돼야 한다는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고 진상조사위는 지적했다.
또 진상조사위는 당시 집회 현장 주변에 차벽을 설치한 것도 집회결사의 자유와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한 과도한 경찰권 행사라고 비판했다
특히 경찰은 백 농민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된 살수차에 대한 안정성 검증도 없이 살수 행위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살수차 사용은 경찰청 내부 지침 외에 법적 근거조차 없었다.
진상조사위는 살수 지휘 체계에서 허모 경비과장 등 현장 책임자 3명이 현장 상황을 보지도 않은 채 무전 지시를 내리는 등 현장관리도 허술했다고 지적했다.
진상조사위는 경찰의 과도한 공권력 행사와 인권침해 사실에 대해 공식적인 의견을 발표하고 피해자 가족과 협의해 사과할 것을 경찰청에 권고했다.
또 민중총궐기 집회와 관련해 국가가 집회 주최자와 참여자에게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취하할 것을 주문했다.
유 위원장은 "당시 집회 주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청구원인을 보면 경찰은 집회 참가자들이 경찰이 금지한 1차 차단선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거나 그 안에서 집회를 개최하려고 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며 "이런 전제 자체가 진상조사위의 결론과 반대되기 때문에 손해배상소송 취하 권고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경찰의 경비계획은 청와대 경호계획이지 집회시위를 보호하기 위한 계획이라 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권고안에는 또 ▲ 국제적 인권기준에 부합하는 '집회시위 보장을 위한 업무지침' 수립 ▲ 살수차·방수포 배치·사용 금지 ▲ 집회·시위 관련 경찰의 물리력 사용으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 공정하고 독립적인 진상조사 보장 ▲ 현장 지휘 및 지시 무전 내용 등 집회·시위 관련 자료 보관 등의 내용도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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