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서정의 밤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가끔은 막차를 타고 오래된 마을로 가고 싶다. 구불텅한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외딴 마을 칠흑의 밤이 나를 기다리고, 나는 그 마을로 가는 마지막 버스의 마지막 승객이고 싶다. 종점, 인가의 불빛이 드물게 있는 그곳으로 가 깊고 오래된 잠을 청하고 싶다. 마을엔 인기척조차 귀해서, 나를 맞이하는 건 조금은 쌀쌀한 밤공기가 전부이리. 나는 달빛 환히 비추는 오솔길을 따라, 소쩍새 울음소리 들으며 어느 외딴집으로 갈 것이고, 대문이 없는 그 집 삽짝에 서서 아주 익숙한 듯 노파를 부르리. 낯선 인기척에 개들이 먼저 짖어댈 것이고, 그제야 초저녁잠 곤히 청하던 노파는 방문을 열고 삽짝을 살피리. "뉜교?" 나는 노파에게 염치없이 하룻밤을 청해볼 참이다.

노파가 골방을 허락하면 나는 그 방의 주인이라도 된 듯 당당히 방 안으로 몸을 밀어 넣을 것이고, 조금 더 염치없는 부탁으로 늦은 저녁을 얻어먹을 것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노파의 이야기를 들으리. 자식들 외지로 다 떠나고, 영감마저 세상을 버린 뒤, 혼자 오막살이 지키고 있다는 노파의 이야기는 이 세상 든든히 지키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어머니의 이야기로 남으리. 나는 어느새 노파와 마주 앉아 오래된 본능으로 밤을 지새우리. 호박이며, 노각이며, 호박잎이며, 고구마 줄기며…. 저 푸성귀, 어느 도회지 젊은 새댁네 저녁상에 오를까. 날이 밝으면 노파는 첫차를 타고 푸성귀를 팔러 장에 갈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시장 한 귀퉁이에 난전을 깔고 이 예쁜 것들을 보기 좋게 내어놓고 흥정을 기다릴 것이다.
늦은 밤, 방 안은 온통 나 닮은 추억으로 가득하리. 사랑과 믿음이 설렘으로 얼룩졌던 내 청춘이 시작될 무렵, 나를 비추던 저 백열등은 얼마나 환희에 찼던가. 인연 다한 사랑에 아파할 무렵, 저 문풍지 사이로 시린 바람은 또 얼마나 무수히 드나들었던가. 저 앉은뱅이책상에서 이 집 딸은 오늘 나처럼 잠들지 못한 밤을 수도 없이 쓰고, 지웠을 것이다. 오래된 마을에는 오래된 밤이 살아서, 낯선 객이 와도 마다 않을 늙은 어머니가 아직도 살 것만 같고, 나는 그 어머니의 오래된 기억에서 또 다른 딸이 되고 싶다.

나는 평생, 낯설지 않은 것들에게 오래된 기억을 떠올릴 것이고, 그 기억들에 대해 몸서리치던 또 다른 기억을 더듬을 것만 같다. 푸르스름하게 달려오는 저 새벽녘에서 어젯밤의 객기들이 부끄러워질 때면, 나는 아무도 모르게 그 집을 빠져나와 물안개 피는 들판을 지나 첫차를 타리.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을 살아가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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