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이 벌이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합시다. 곡식 생산을 늘려 일본에 제공합시다. 지역 철도를 설치해 물자를 나릅시다."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에 창덕비가 세워진 서강준(본지 8월 15일자 1면 보도)이 실제로 일제에 부역한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비석을 옮기거나 해설문을 설치하는 등 역사적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달성서씨 대종회에 따르면 고 서강준은 1898년 상주 금곡에서 태어나 1984년 대구 중구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해방 이후 경북도의회 초대 의원(1952~1956년)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1939년 대구에 큰 가뭄이 닥치자 전국 각지에서 곡식을 구해 지역민에게 나눠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서강준의 다른 행적을 보면 조선총독부에 동조한 정황도 드러난다.
창덕비를 보면 서강준은 일제가 조선인 창씨개명을 시작한 첫 날인 1940년 2월 11일 이름을 '대성준부(大城俊夫)'로 바꿨다고 적혀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대성준부는 1941년 9월 11일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 경북도지부 발기인 명부에도 남아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춘원 이광수, 김활란 등 당대 저명인사들이 참여해 조선인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독려한 친일 단체다.
창덕비와 달성서씨 대종회 자료를 보면 서강준은 1930년대 지역 밀착형 법률사무소인 상주사법서사회 제1사무소(서강준사무소)를 운영했다. 1940년대에는 조선식량영단 경북지부장과 조선상공회의소 부회두(부회장)로 활동했다.
사법서사는 조선총독부 사법부를 보조했으며 조선식량영단은 1943년 총독부가 쌀 생산 증대와 배급, 공출을 하고자 국내 기업가 등을 모아 운영한 단체다.
당시 언론 보도에는 서강준이 1929년 '성주 가솔린궤도 속성기성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내 철도 부설 허가를 촉진한 기록도 나온다.
근현대사를 전공한 지역대학 한 교수는 "일제가 조선 자원을 관리·수탈하고 병력을 동원하고자 펼친 정책을 서강준이 두둔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제 치하에서 성장하면서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거나 알고도 묵인했을 소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서강준을 '위인'으로 표기한 창덕비를 현재대로 보존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입장이다. 오홍석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장은 "대구시가 인물 행적 조사 및 창덕비 이전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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