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국화 문양 비석이 남긴 뜻은?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꼬박 3개월이 걸렸다. 대구 두류공원에 '의문의 비석'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부터 그 의문을 풀기까지. 지난 6월 1일, 대구의 향토사학자 이정웅 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의 소개로 만난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회 사무국장은 사연을 알 수 없는 비석 이야기를 꺼냈다. '위인 달성 서강준 창덕비'(偉人 達城 徐罡俊 彰德碑) 즉 '뛰어난 사람 달성 서씨 서강준의 덕을 밝히는 비'였다.

그리고 그 정체를 알 수 없겠느냐고 제보했다. 비문을 새긴 비신(碑身) 위 덮개석 한쪽에 선명한 일본 국화 무늬와 1940년 2월 11일 '대성(大城)으로 창씨(創氏)했고, 이름은 준부(俊夫)로 바꾸고, 누가 비문을 짓고 썼으며 1943년 3월 비를 세웠다'는 정도만 겨우 알 수 있었다. 354자가 한문이니 알 턱이 없다.

송 국장의 판독으로 '1939년 대구에 큰 가뭄이 들어 곡식이 부족하자 당시 미곡상조합장이던 서강준이 사재를 털어 다른 지방에서 쌀을 구해 대구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내용을 알았다. 배고픔을 구한 좋은 일을 한 만큼 비를 세워도 될 만했다. 그런데 뭐가 더 궁금한 것일까?

서강준의 정체가 도대체 뭐냐는 물음이었다. 70년 전 대구 사람들이 돌로 고마움을 기릴 만큼 훌륭한 '달성 서씨 가문의 위인'이라면 마땅한 기록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2014년 대구시 등 여기저기 묻고, 2016년 대구 언론사 기고로 공개적인 도움 요청에도 여전히 알 길 없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하소연이다.

결국 본지 취재와 지난 8월 두 차례 보도로 그의 활동을 비롯, 전모는 아니지만 지난 세월 묻혀 있던 활동과 정체의 일부나마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물론 이번에 그의 '창덕'에 가려진, 일제의 자원 수탈 지원에 나서고 한국인의 전쟁 참전 독려와 같은 친일 행적까지 드러났다.

그런데 그의 추적 3개월에 절감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먼저 대구시의 역사 무감각이다. 송 국장처럼 관광해설의 입장에서 대구 역사, 특히 인물 정보는 필수다. 게다가 비석까지 갖춘 인물이면 더없이 좋은 소재지만 이번에 드러난 것처럼 대구시의 역할은 전무했다. 의문을 푸는데 4년 걸렸으니 다시 뭘 기대할까.

다음은 흩어진 자료 잇기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딱이다. 그의 자료는 결코 없지 않았다. 다만 문중, 경북도의회, 대학, 언론사 등 곳곳에 조각처럼 따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파편의 얽기는 힘들고 일반인이면 더 말할 나위 없다. 대구 근대사 연구가 더 필요하고 역사 그물망의 뚫리고 빈 곳이 많고 폭도 넓다는 방증이다.

대략 이런 문제를 던졌지만 이번 비석에서 배운 교훈의 울림은 크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된 점에서 더욱 그렇다. 나라를 잃음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분명 선(善)하게 살았을지도 모르는 인물이, 어쩔 수 없이 창씨에 개명까지, 나아가 일제 수탈 동조의 친일이란 역사의 죄인 굴레를 쓸 수밖에 없는 일을 겪게 될 수도 있음을 말이다.

이번 비석에 얽힌 의문을 푼 일은 여럿 사람의 힘이 보태진 덕분이다. 필자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아픈 과거 상처를 덧낼 수도 있음에도 기꺼이 자료와 정보를 밝힌 달성 서씨 문중과 대학 전문가, 재미 없는 주제를 끈기있게 추적한 후배 기자, 믿음으로 지켜본 제보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번 일은 분명 대구 역사를 밝히는 땀이 되리라 믿는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