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하빈의 시와 함께]무명 강해림(1954~ )  

 

울 엄마 자궁에서

세상구경 나올 때

처음으로 날 받아준 건 무명이었네

내 자궁 문밖으로 흘러간 초경이

닿은 첫 귀착지도 무명이라네

밤새 물레를 돌리고

실을 뽑아 베틀가를 부르며 짜 올렸을

고 착하디착한 것이 변심을 했나

아리아리 아프고 억울할 일도 없는데

질기고도 캄캄한 것이

가슴 쥐어뜯으며 자승자박하게 하던 것이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 다함도 없다는데

악착같이 기어오르는 사고무친인 것이

진드기처럼 들러붙어 끝내 떨어지지도 않던

통성명할 이름 석 자도 없는 것이

―시집 『그냥 한번 불러보는』 (시인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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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덩이였던 나를 처음 받아준 것도 ‘무명’, 달거리할 때 나를 포근히 감싸준 것도 ‘무명’이었도다. 우리 아낙네들이 베틀에 올라앉아 목화실로 밤새워 짠 바로 그 무명베로다. 한편으론, ‘아프고 억울할 일’을 뒤로한 채 무명끈에 스스로 목매달았던, 사랑과 이별의 ‘질기고도 캄캄한’ 기억도 있었으리라.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 다함도 없다’(無無明 亦無無明盡)는 반야의 지혜, 그 속에는 ‘진드기처럼 들러붙어 끝내 떨어지지도 않던’ 무명(無明)도 숨어 있도다. 한낱 집착 때문에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그 무명치(無明痴) 말이로다. 아, 이제는 참나를 찾아 탐진치(貪瞋痴)를 떨쳐 버리고 무위자연으로 돌아가 ‘통성명할 이름 석 자도 없는’ 무명초(無名草)로 살고 지고! 이렇듯 ‘무명베(끈)-무명치(無明痴)-무명초(無名草)’로 이어지는 ‘무명’의 다양한 사유와 변주를 통해 우리네 삶의 만화경을 들여다보게 하는도다.

시인·문학의 집 ‘다락헌’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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