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론새평] 군대, 지금도 가슴이 뛴다

김주영 소설가·객주문학관명예관장

김주형 소설가
김주형 소설가

어머니께 편지 쓰면서 울먹였던 기억
먼동 트는 새벽 행군하며 젊음 확인
세상사 두려울 게 없는 자신감 배워
자식 사랑한다면 일부러 고생시켜야

누구나 늙게 되면, 기억력에 타격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집 전화번호와 자신의 핸드폰 번호, 아내의 핸드폰 번호, 흉허물 없이 지내는 친구들의 전화번호 몇 개, 아내 몰래 개설한 통장번호, 이런 번호들은 언제 어디서든 대뜸 기억할 수 있어야 치매에 걸렸다는 의심을 받지 않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그런 번호들을 떠올릴 수 없을 때가 있다. 심지어 자기 집 현관문 앞에 당도해서 디지털 도어록의 번호를 기억 못해 쩔쩔맬 때도 있다.

그런데 필자의 경우, 정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어도 일사천리로 기억할 수 있는 두 개의 번호가 있다. 그것이 바로 군번과 훈련소에 입소해서 처음 지급 받았던 총번이다. 왜 그럴까. 어째서 다른 것은 모두 하얗게 잊는데, 군번과 총번만은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이끼처럼 찰싹 달라붙어 생생하게 살아있는 군번을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뿐만 아니라, 노령의 몸으로 저승사자와 수시로 통화하고 있는 지금도 군대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참견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병영 생활은 평상시에 겪었던 고통 따위는 하찮은 것이고 털끝만치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만든다. 아프면 약 바르고 가려우면 긁으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같다'라는 언어적 콘돔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다는 어정쩡한 태도로는 이 험한 세상을 강단 있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군대는 삼엄하게 가르친다.

삭풍이 불어닥치는 혹한 속, 얼음장처럼 차가운 참호 속에서 난생처음으로 어머님께 편지를 쓰면서 울먹였던 기억도 결국은 내 삶을 풍요롭게 적셔준다는 것을 군대는 가르쳐 주었다. 땀과 땟국물이 뚝뚝 흐르는 양말을 연탄난로에 쬐어 말리면서, 하루의 일과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자긍심에 젖었고, 먼동이 트는 새벽의 행군에서 내 젊음도 피처럼 뜨겁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었다.

식사는 언제나 충분치 못했고, 목에 차고 있던 군번줄을 벗어 인식표로 수저를 대신할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웃음 짓게 한다. 저의가 의심스러운 악질적인 기합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나, 그것을 극복하면서 긍정의 힘을 가진 젊은이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군대였다. 그래서 평온함 속에서 겪는 갖가지 경험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별다른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군대는 이웃 사람이 가는 곳이니 나도 할 수 없이 가는 곳이 아니라, 기필코 가야 할 곳이라고 내게 가르쳤다.

내 안에 들어앉아 잠자고 있는 젊음의 기백이 무엇이며, 세상의 격정적인 민낯들과 조우하면서 얻은 경이적인 체험을 하고 싶다면 군대만 한 공동체도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땀 흘리지 않고는 달콤함도 없다는 속담처럼 군대는 하찮은 젊은이로 하여금 땀 흘리게 했고, 땀 흘린 만큼의 자신감을 가진 젊은이로 만들어준다. 그래서 치열한 삶이란 무엇이며, 비겁한 것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입대한 아들의 훈련장까지 뒤따라 다니며 간식거리를 챙겨주며 엄호하는 부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런 부모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부모란 이름이 부끄럽고, 그것을 용납한 군대 역시 있으나 마나다. 군대야말로 어디 가서도 비겁하지 않으며, 남의 등 뒤에 숨지 않는 강철 같은 젊은이를 사회에 배출시키는 용광로이기 때문이다.

최전방 부대에 배속되어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오면, 모든 세상사가 두려울 게 없는 자신감을 갖게 가르치는 곳이 바로 군대다. 당신이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일부러라도 고생을 시켜라. 성공의 체험보다 고난의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대인 사고법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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