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12> 학생들의 만세 시위

계성학교·대구고보, 대구경북 첫 만세운동 이끌다
영천 신녕공립보통학교는 한밤 중 만세시위
예천 용궁공립보통학교는 거사 전날 들통나 아쉽게 불발

1919년 3월 7일과 8일의 계성학교 일지. 7일은 출석 41명, 결석 5명으로 나와있지만 만세운동이 일어난 8일의 학생 출결석란은 비워져 있다. 계성학교 제공.
1919년 3월 7일과 8일의 계성학교 일지. 7일은 출석 41명, 결석 5명으로 나와있지만 만세운동이 일어난 8일의 학생 출결석란은 비워져 있다. 계성학교 제공.

일제 강점기 학생들은 민족 운동 선봉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며 저항했다. 학교 현장에서부터 뼈아픈 차별 교육을 당하는 등 일제의 각종 탄압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정규 학교에서의 교육은 철저한 식민지 우민화 교육이었다. 일제는 우리 말과 글을 없애고, 역사도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조작했다. 학생들은 일제의 수탈 정책과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한 반발해 시위 운동을 벌였다. 일부 학교는 동맹 휴학 투쟁을 전개했고 비밀 결사를 조직한 곳도 있었다.

◆대구경북 첫 만세운동 이끈 계성학교와 대구고보

1919년 3월 8일, 1천여 명의 인파가 서문밖시장에 운집해 동성로까지 행진하며 뜨겁게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대구경북의 첫 만세운동이었다. 이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계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이하 대구고보)가 있었다.

계성학교는 교장, 일본인 교사를 제외한 교사와 학생 대부분이 만세운동에 참여하며 지역 만세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다. 민족 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이갑성은 대구경북의 만세운동을 실행하고자 2월 25일 전 계성학교 교감 이만집 목사와 당시 교사였던 백남채 등을 만났다.

3월 4일에는 계성학교 졸업생이었던 김무생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가져와 독립선언문 200매를 계성학교 등사판으로 인쇄하는 데 힘을 보탰다.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은 독립선언서 일부를 자전거에 싣고 칠곡 등 경북지방에까지 비밀리에 배포했다. 계성학교 출신 학생들이 대구경북 만세운동의 조직과 확산 과정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희생도 컸다. 이만집 목사는 징역 3년, 교감 김영서와 졸업생 김무생은 징역 2년을 언도 받는 등 전·현직 교사 8명과 학생 36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전교생은 46명에 불과했다. 계성학교의 겨울 개학은 1년 뒤인 1920년 4월에야 이뤄졌다..

계성학교 학생들의 투쟁은 만세운동 뒤로도 이어졌다. 김수길 등 계성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9명은 4월부터 일제가 만세운동의 동력을 빼앗고자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자 이에 맞서 '혜성단(慧星團)'을 결성, 상인들의 철시투쟁 등을 이끌었다.

1966년 계성학교 개교 60주년 기념 3.1운동 재현행사. 계성학교 제공.
1966년 계성학교 개교 60주년 기념 3.1운동 재현행사. 계성학교 제공.

대구고보도 계성학교로부터 전해진 만세운동 소식에 뜨겁게 호응했다. 대구고보 학생 허범은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이 살던 대남여관의 주인 아들이었다. 허범은 여관에 투숙한 김무생에게 대구고보 학생대표 신현욱을 소개했다. 만세운동 참여를 결심한 신현욱이 대구고보 전교생 239명 중 200여 명의 동참을 이끌어내면서 운동 규모가 대폭 커졌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대구고보 학생 중 48명이 투옥됐다. 이 중 백기만, 허범, 신현욱 등 5명이 1심에서 징역 6개월~1년을 선고받고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대구고보도 학교 차원에서 학생들 20명(퇴학 2명, 정학 7명, 근신 11명)을 징계했다.

대구고보 학생들은 학교의 이 같은 조치에 크게 반발, 3월 8일부터 동맹휴학을 했다. 학교는 같은 달 28일 무기휴업에 들어갔다가 같은 해 5월 20일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밤에 전개된 영천 신녕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

대구의 만세운동은 경북으로 이어졌다. 4월 6일 밤 영천 신녕공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신녕공립보통학교 박필환 교사가 주도했다. 박필환은 1919년 3월 16일 밤 같은 학교 졸업생 이성백을 통해 영천 신녕면 왕산동과 매양동에 사는 학생 20~30명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연설했다. 그는 "너희들은 기백이 없는 것이다. 조선 각지에서 일어나는 만세 시위운동을 본받아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10여 일 뒤 첫 번째 만세운동이 열렸다. 박필환은 동료 교사 이석형, 친구 황응두와 함께 신녕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한종수를 만나 귀가하던 중 완전동 포교소와 화성동 주재소 앞에서 각각 독립 만세를 수차례 외쳤다.

박필환의 영향을 받은 신녕공립보통학교 황정수. 김호용, 박칠성, 구위준 등 4명은 4월 6일 오후 3시 30분쯤 신녕면 완전동 노영수의 집에 모였다. 황정수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집 뒤뜰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독립 만세를 외치자 나머지 참석자들도 함께 외쳤다. 그날 밤 11시 30분쯤 조표이와 보통학교 학생 15명도 매양동의 동방천변에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읍내로 행진하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해산당하고 관련자 18명이 붙잡혔다.

영천 신녕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지 전경. 김영진 기자.
영천 신녕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지 전경. 김영진 기자.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했던 영천지역 만세운동은 일반인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박필환 등은 기독교 신자 김준운을 만나 만세시위 운동을 지도하고 4월 8일 영천시장에서 함께 같이 시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신녕보통학교 학생들이 모두 검거되면서 거사도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

박필환은 그해 5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됐다. 앞서 박필환의 영향을 받은 황정수는 징역 10월, 김호용·박칠성·김해오는 각각 징역 6월, 조율이·구위준은 각각 징역 4월을 선고 받았다. 김준운은 체포되어 4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 받았다.

◆예천 용궁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

1919년 4월 12일 용궁공립보통학교 4학년 정진완은 예천 용궁면 만세운동을 처음 주도했다. 정진완은 평소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된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언제라도 기회만 주어지면 독립운동에 투신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신문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서 그는 용궁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마음 먹었다.

정진완은 4월 8일과 11일 학교 기숙사에서 같은 학교 졸업생 김칠종과 4학년 학생 이구성의 동의를 끌어내고 그 자리에서 거사 날짜를 정했다. 12일 오전 9시쯤 용궁공립보통학교에 모여서 시장으로 나가 만세시위를 벌이자는 약속이었다.

예천 용궁공립보통학교 터의 현재 모습. 김영진 기자.
예천 용궁공립보통학교 터의 현재 모습. 김영진 기자.

정진완은 용궁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김칠종은 용궁면 소재지 사람들을, 이구성은 용궁면 소재지 밖의 사람들을 각각 모으기로 했다. 11일 밤에는 기숙사에서 정진완, 김칠종, 이구성, 정태원이 태극기 22개를 만들었다. 임우경이 사 온 한지 5장에 정규원이 대형 태극기를 그렸으며 김국경은 깃봉을 만들었다.

이들과 별개로, 용궁면 무이리에 사는 대구농림학교 졸업생 이만성 등 세 사람도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구성이 이만성을 찾아가 의논한 끝에 두 조직은 12일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만세시위 계획이 거사 전날 드러나고 말았다. 일본인 교장이 만세운동에 참가하려던 한 학생 학부형의 연락을 받자마자 헌병대에 보고한 탓이다. 예천 헌병분대 소속 헌병 3명이 수비병 3명의 지원을 받아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거사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17명이 붙잡혔고, 태극기 등 준비물도 모두 압수당하고 말았다. 용궁 3·1만세는 어린 학생들(당시 4학년 평균나이 16.3세)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돼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됐지만,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검거된 17명 중 6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이들은 안동지청에서 1심 형량으로 징역 1년 6월 등을 받았다. 이는 예천 만세운동에서 가장 큰 형량이다. 비록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만세 주동 인물들의 독립의식과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이 워낙 강경했다 보니 일제 사법부도 중벌을 내려 민족의 기를 꺾으려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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