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한글사용설명서

한글작가 이미나

이미나 한글작가
이미나 한글작가

"한글 작가가 무슨 뜻이에요?" 명함을 전할 때마다 받는 질문이다. '아름다운 한글, 올바르게 쓰는' 한글 작가가 된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2016년 11월. 원하던 잡지사에 갓 입사했을 때다. "자료 조사 좀 디테일하게 해." "스케줄 컨펌받았니?" "시간이 타이트해. 스피드하게 하자." 미국인지 한국인지 모를 대화가 공기를 떠다녔다. 혼란스러웠다.

하루는 기사 마지막 교열을 보던 중이었다. 영어 '크리미'(creamy)가 번역되지 않은 채 그대로 실려 있었다. 맥락을 파악해 '거품이 풍부한'으로 순화하기를 상사에게 건의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비경제적이고 뜻이 와닿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언제부터 그들은 모국어보다 외국어에 더 익숙해졌을까.

기자란 본디, 글로 정보를 전달하고 사람과 소통하는 직업이기에 적확한 문장과 올바른 표현을 위해서는 말글살이도 바람직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신념을 지킬 수 없었고 난 4개월 만에 잡지사를 나왔다. 그날을 계기로 나만큼은 한글을 올바르게 쓰겠노라 다짐하게 되었다.

사명감 탓일까. 글쟁이 유전자 탓일까. 언제부터인가 티브이(TV) 속 자막 한 줄, 대사 한마디 그냥 흘리지 못한다. 날마다 심해지는 외국어 혼용과 난무하는 신조어, 그사이 망가지고 일그러지는 한글을 마주할 때면 호흡마다 안타까움과 비통함이 섞여 나온다. 설상가상 더 자극적인 내용으로 시청자 시선을 끌기 위해 앞다투어 한글을 짓밟아대는 방송을 목격할 때면, 깊은 좌절에 고개가 풀썩 꺾이곤 한다.

그러던 중 글 쓰는 사람으로서 꼭 이루어야 할 목표가 생겼다. '올바른 한글 전도사'가 되어 방송 피디(PD)와 작가에게 바른 한글 사용법과 우리말 가치를 교육하는 일이다. 명함을 판 지 겨우 2년이지만, 지금처럼 한글을 아끼고 보듬어 나간다면 분명 기회가 오지 않을까. 티브이와 라디오에서 아름다운 한글이 투명하게 흘러나오는 광경을, 오늘도 상상해본다.

10월 9일, 한글날이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제 뜻을 글로 써 펴지 못하는 불쌍한 백성을 위해' 세종대왕 주도로 스물여덟 자 '한글'이 탄생한, 역사적이고도 기념비적인 날.

미국 메릴랜드대학 로버트 램지 교수는 매년 우리나라 한글날에 맞춰 탄생을 축하해왔고 '총, 균, 쇠'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격찬한 바 있다. 그뿐일까. 1997년 유네스코는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 외에도 창제자와 창제 시기, 제작 원리와 철학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문자는 세계에서 한글이 유일하다며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해 그 가치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어떨까. 외국어만 높게 평가하는 사대주의에 파묻혀 우리글이 지닌 위대함과 편리함을 모른 체하고 있지는 않은가. 올해로 한글날은 572돌을 맞는다. 말하고 듣고 쓰는 언어생활을 윤택하게 해줌은 물론이요, 생각하고 사유하며 삶을 배워가는 데 더없이 큰 도움을 준 우리말 '한글'에 감사를 표해보자. 우리말과 글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해보자. 오늘만큼은 그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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