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할 계획은 종교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각 추진되고 있었다.
일제가 한국 강점 직후 저항 세력을 제거하고자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에 대해 강제 해산 조치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라 안에서 조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세력으로는 사실상 종교계와 학생조직밖에 없었다.
이들 국내 조직과 국외지역 독립운동가, 유학생의 구국 에너지가 한 곳으로 어우러져 펼쳐진 항쟁이 바로 3·1독립만세 운동이었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불교신도들인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시위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종교 탄압까지 일삼은 일제의 정책 아래 불교도 구조적으로 친일화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던 시기에 일어난 지방학림 학생들의 만세운동 등은 일제의 불교탄압에 맞서면서 민족의 독립을 염원한 의거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제 경계 속 만세시위 펼친 대구 동화사
두 차례의 독립만세로 대구지역 민족운동 지도자와 학생 대부분이 체포됐다. 더욱이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는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로 휴교령이 내려졌고, 일본군 보병 제80연대 병력이 대구 전역에서 삼엄한 경계를 폈다.
이러한 상황에서 또다시 달성군 공산면 팔공산 동화사 소속인 지방학림 학생들에 의해 1919년 3월 30일 남문 밖 시장에서 독립만세가 일어났다.
이는 불교중앙학교 학생 윤학조가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에 참가한 후 고향인 달성군 공산면으로 내려오면서 시작됐다. 그는 3월 23일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를 방문해 부속학교인 지방학림 학생 김문옥, 권청학 등 몇 명을 만나 서울의 소식을 전하고 만세운동을 하자고 설득했다.
김문옥, 권청학 등은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하자는 윤학조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3월 28일 지방학림 학생 전원을 동화사 내 심검당에 모았다.
김문옥은 그 자리에서 "신문 기사를 보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각지에서는 이미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도 민족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두 찬성했다. 그리고 의논을 거듭한 끝에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 장날로 거사일을 정하고 서둘러 준비했다.
거사를 하루 앞둔 3월 29일 김문옥 등 9명은 준비물을 가지고 동화사를 출발해 대구로 향했다. 3월 30일 날이 밝아오자, 김문옥은 가지고 온 흰 천으로 큰 태극기를 만들고 학생들과 함께 남문 밖 시장으로 들어갔다.
오후 2시 무렵 시장에는 2천여 명이 있었다. 3월 10일 이후 한 차례의 독립만세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의 경계는 다소 느슨했다. 학생들은 시장 한복판에서 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준비한 소형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이 호응했다. 학생들이 선두에 서고 군중이 그 뒤를 따르면서 시장은 순식간에 만세소리로 가득 찼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일제 군경은 급히 시장으로 출동하여 총검으로 해산시켰고, 이어서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을 체포했다.
그 가운데 이성근, 김문옥, 이보식, 김종만, 박창호, 김윤섭, 허선일, 이기윤, 권청학 등은 1919년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10월을 받았고,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을 거쳐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주지 반대에도 전 학생이 만세시위 앞장 선 문경 김룡사
문경 산북면 운달산 자락의 산속에 있는 김룡사에서 독립만세가 시도됐다.
1919년 3월 25일 문경 김룡사의 공비생(출가 교역자가 되기 위해 교단의 육영장학금을 받아 공부하는 학생)으로 불교중앙학림에 유학 중이던 전장헌이 구두 밑창에 독립선언문 한 장을 숨겨 김룡사에 와서 전해주고 다음날 급히 상경했다.
이것이 기폭제가 돼 4월 11일 오후 7시쯤 김룡사 지방학림 기숙사에서 송인수, 성도환 등 두 명이 만세시위를 위한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학생들을 부추겨 궐기를 촉구했다. 그때 기숙사에는 최덕찰 외 10여 명이 있었고, 13일 일제 식민통치기관인 헌병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로 날을 잡았다.
김룡사 부설 지방학림 학생들 18명이 13일 오후 3시쯤 수업을 마친 후 독립시위를 위한 장도에 올랐다. 학생들은 태극기 4매를 준비해 일제 헌병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하리에 가서 만세를 부르고자 산문을 나섰다.
이들이 이곡리 석문안에 다다랐을 때 김룡사 주지이고 교장인 혜옹 스님이 조랑말을 타고 와서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으며 윽박질러 결국 헌병주재소까지 가지 못한 채 돌아오게 됐다.
김철, 민동선의 증언에 따르면 만세운동 당시 김룡사 지방학림에는 본·말사에서 파견된 공비생과 신교육을 갈망하던 상주, 문경, 예천 등지 불교신도 가정의 자제들을 합해 학생 수가 8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수업 연한이 2년이었으니 당시 1개 학년은 40여 명 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학생들은 30명이 1개의 단을 구성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또 경고문까지 감춰 길을 나섰다는 증언으로 미뤄볼 때 18명이란 기록보다는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 한 숫자가 더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주지 교장의 느닷없는 저지로 어쩔 수 없이 귀사한 다음날 아침 헌병들이 들이닥쳐 학생들을 교실에 몰아넣고 문전에서 차례로 결박해 27명을 문경 헌병대로 잡아갔다.
헌병대에 10여 일 구치돼 호된 심문을 받은 뒤 24명은 가까스로 풀려나오고 송인수, 성도환, 김훈영 등 3명은 상주지청에서 재판에 넘겨져 형을 받았다.
송인수, 성도환 두 사람은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재판을 받기까지 한 달여 동안 모진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댓글 많은 뉴스
"촉법인데 어쩌라고"…초등생 폭행하고 담배로 지진 중학생들
"죽지 않는다" 이재명…망나니 칼춤 예산·법안 [석민의News픽]
[매일춘추-김미옥] 볼 수 있는 눈
이재명 사면초가 속…'고양이와 뽀뽀' 사진 올린 문재인
대구경북 대학생들 "행정통합, 청년과 고향을 위해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