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왔어."
"어떻게 알 수 있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 이건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
"경험이야?"
"글쎄, 더듬이로 알 수 있다고 하면 믿겠어?"
때론 뭔가가 왔다는 걸 조리있게 말하기 어렵다. 논리적 전개로 도출된 게 아니어서다. '촉'이라 불리는, 오감(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이외의 것에 의존하는데 인간에겐 없는 더듬이 역할이다.
가을이 왔음을 온도가 떨어졌다는, 책이 읽고 싶다는 과학적, 계몽적 변화와 상관없이 안다. 늘 논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이 그렇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직감의 안테나는 별안간 켜진다.
경주에서는 촉이 약해도 가을임을 알았다. 가을이 눈에 보였다. '꽃'이었다. 가을에만 피는 꽃이었다. 가을은 귀로도 들렸다. 만발한 가을꽃 속에 여러 종류의 웃음소리가 한데 뒤섞여 넘쳤다. 꽃을 보고 함박웃음, 사진을 찍으며 미소, 찍힌 사진을 보고 박장대소. 꽃을 스친 바람은 뺨을 스치고 실어온 꽃의 향을 코끝에 전했다. 미각이 못내 아쉬웠지만 오감을 모두 자극받지 않아도 충분히 가을이었다.

◆동부사적지 꽃밭
가을은 스스로의 왕림을 경주 인왕동 고분군에 아뢰었다. 내물왕릉을 비롯한 고분군은 스스로를 가을에 어울리게 내줬다. 가을은 꽃을 피워 왕릉을 높이며 자신도 높아졌다. 고분군과 계림, 첨성대는 가을에 맞게 꽃과 어울렸다.
'꽃놀이도 하루이틀'이라고는 하나 좋은 걸 감추기도 힘들다. 사람이 꽃을 보고 얼마나 좋아들 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모여들었지 동부사적지 주변이 주차난을 겪을 정도다. 평일에 와서 다행인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벌과 나비만 꽃 앞에서 온몸으로 격렬히 반응하는 게 아니었다. "잠시 정신이 나간 것 같다"는 표현도, 학구적이진 않으나 객관적인 느낌으로 언론보도 양식에 자주 나타나는 "이성을 잃었다"도 부적절했다. 걸그룹을 본 군인들에 비할 만큼 사람들은 꽃에 열광했다.

꽃을 향해 벌과 나비가 달려드는 것은 꿀을 얻으려함이라 배웠다. 가을을 느껴버린 인간도 꽃을 좇는다. '심미적 연유에서 기인한다'는 문구로 갈음하는 책자가 간혹 있는데 성의가 없다. 경주에서 본 이들은 '인생샷(인생을 통틀어 기억에 남을 만한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과 '추억'이란 걸 남기려했다.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소리는 "택뱁니다"가 아니라 "자, 하나 둘 셋", "까꿍, 오르르 여기 봐"다.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고 설렘의 기간은 짧아졌다. 그래도 사진을 찍기 전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오르고, 인생샷이 터지면 성취감에 탄성도 터진다. 사진찍는 인간, 남기려는 인간 '호모 시그노(Homo Signo)'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핑크뮬리와 친구들'
인생샷과 추억의 첫 번째 조연은 '핑크뮬리'였다. 뭐, 경주에선 뭔들 좋지 않으랴만 핑크뮬리는 좀 특별했다.
핑크뮬리는 엄밀히 말해, 꽃이 아니라 풀이었다. 자줏빛 억새다. 우리말로 '분홍쥐꼬리새'라는 이름도 있다. 꽃 이삭이 쥐꼬리를 닮은 풀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은 거라고 한다. '검은단물'보다 '콜라'이듯 입에 더 감기기는 핑크뮬리다. 이름에서처럼 분홍색이면 좋을 텐데 자주색에 가깝다.
오미자 음료 색깔과 비슷해 그 자줏빛에 침이 고인다는 게 뜻밖의 단점이었다. 학습효과란 무섭다. 하지만 자줏빛 솜이불이나 스웨터를 깔아놓은 것처럼 보여 안락감을 줬다. 안락감에 졸렸다는 건 또 다른 함정이다. 그래서 꿈을 꾸는 듯했다.

웬만하면 인생샷으로 잘 나오는 포토존이 따로 있다. 햇살이 강할 때와 구름이 끼었을 때 색깔이 달라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몽환적이다.
경주 말고도 규모는 작지만 군데군데 핑크뮬리 군락이 조성된 곳들이 있다. 안동 영가대교 둔치, 구미 남구미대교 아래, 그리고 대구에도 있다. 규모가 작아 추천하기 겁나니 각자 검색해 가보는 걸로. 핑크뮬리 붐을 일으킨 제주는 물론 경기 양주, 전남 함평, 부산, 서울에도 있다.
하지만 단연 경주에 엄지를 치켜드는 건 배경 덕분이다. 면적의 차이는 있지만 어디든 주연은 핑크뮬리인데 경주는 주연급 조연이 계림, 첨성대, 고분군이다. 다른 곳들을 압도하는 초록의 배경이다.
핑크뮬리 말고도 동부사적지에는 꽃들이 지천이다. 꽃밭은 화훼 지식 경연장이다. 해바라기 정도나 알까 이름을 몰랐던 꽃들이 태반이다. 몰라 봐서 미안했는지 저마다 이름을 묻고 답하고, 정답을 확인한다. 한 송이씩이었다면 더 몰랐을 꽃들이다. 무더기로 피어나 있으니 집단적 존재감이 배가된다.
이름도 알게 됐으니 왠지 친해진 느낌이다. 이름을 몰랐어도 실로 꽃들은 스스로 흐드러져 사람들을 맞고 있다. 다가오는 사람의 행실이 어떠하든, 외모가 어떠하든, 사상이 어떠하든 가리지 않는다. "누가 꽃인지 모르겠다"는 상투적인 표현의 진위를 가릴 필요는 없다. 어쨌든 주인공은 꽃이니까.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평화롭다. 연배의 고저, 삶의 역경에 따라 '아이고', '무시라', '어머나', '캬'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탄사가 나온다. 꽃밭에서 전쟁 장면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나친 평화는 나태를 부른다 해도 꽃에 취하는 걸 경계하는 국가는 없다. 건전한 탐닉 축에 속하니 마음껏 탐닉하시라.

◆서악지구 왕릉 꽃밭 '구절초'
서악서원에서 걸어 진평왕릉 방면으로 올라오면 구절초와 고분군이 조화를 이룬다. 구절초 하얀꽃이 고분을 떠받치듯 보인다. 고분군은 구름에 떠있는 봉우리처럼 보인다. 보물로 지정된 서악동 삼층석탑에 다다르면 곧 천상의 누군가가 나와서 맞이할 것만 같다. 한약재로도 쓰이는 구절초 향이 강해 신선이라도 나와 주셔야 할 것 같다.
구절초는 차로도 활용할 수 있어 마을에서 심었다고 한다. 서악마을 주민들과 신라문화원이 KT&G의 도움을 받아 매년 조금씩 심어오고 있다고 했다.
이 일대는 무열왕릉 옆 마을로 익히 알려져 있었다. 지금은 잘 보이지만 선도산 고분군은 대나무와 아까시나무에 둘러싸여 고분인지도 몰랐던 곳이다. 나무들을 베어내자 무덤들이 드러났고 빈 자리에 국화를 심었다. 하지만 국화는 고분군과 어우러지지 못했다. 야생화면서 유적과 잘 어울리는 흰색의 구절초로 바꾸길 3년. 3년을 넘기자 무더기로 핀 모습이 제법 보기 좋다.
도봉서당 바로 옆, 선도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선 '달빛음악회'라는 이름으로 문화제도 열린다.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서악(西岳)에서 오줌을 누자 서라벌이 잠기더라는 그 꿈의 서악이 선도산이었다. 그 꿈을 산 보희의 여동생 문희는 왕이 될 남자를 배필로 맞는데 그 왕이 바로 무열왕 김춘추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