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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출신 김창호 대장 5년 전 매일신문 인터뷰 기사…"등산은 '느림' 즐기는 과정"

김창호 대장. 경북 예천 출신 산악인. 매일신문DB
김창호 대장. 경북 예천 출신 산악인. 매일신문DB

경북 예천 출신 산악인 김창호 대장이 히말라야 네팔 구르자히말산 등반중 한국시간으로 12일 오후 안타까운 실종 사고를 당했다. 현지 경찰 등은 김창호 대장을 비롯한 한국인 원정대 5명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을 13일 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국 산악인들의 안타까운 마음이 사고를 당한 대원들에게 쏠리고 있다.

다음은 매일신문의 2013년 2월 23일 자 신문 김창호 대장 인터뷰 기사이다.

김창호 대장. 경북 예천 출신 산악인. 매일신문DB
김창호 대장. 경북 예천 출신 산악인. 매일신문DB

[인터뷰通] 등산은 '느림' 즐기는 과정… 산악인 김창호 씨

벵골만 해발 0m부터 에베레스트까지 무동력 등정

'탕~' 2004년 7월 6일 오후. 파키스탄의 오지 발타르 빙하지역 내 바투라 2봉에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곳을 탐사하던 산악인 김창호(44) 씨가 빙하지역을 막 빠져나가던 찰나였다. 김 씨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윽고 무장괴한 3명이 천천히 김 씨 앞으로 다가왔다.

마을에서 사람을 죽이고 경찰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온 자들이었다. 카메라와 현금을 빼앗기고 나서야 김 씨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다행히 3일 후 경찰들과의 총격전 끝에 괴한들은 모두 붙잡혔다.

한 달 후 파키스탄의 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재판. "이들의 죄를 용서합니까?" 판사의 물음에 피해자였던 김 씨가 입을 열었다. "네 용서합니다." 일순간 법정이 술렁거렸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괴한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고통과 상처를 준 그들이 원망스럽기보다는 살려줘서 매우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용서해주겠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네'라고 대답했죠."

오히려 유치장에 있던 무장강도에게 100만원을 선뜻 건네줬다. 자신을 죽이려 한 무장강도에게 선행을 베푼 것. 아쉽게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얼마 후 김 씨는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가 총격에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14좌 무산소 등정 도전

사선(?)을 무사히 넘고 원수에게 사랑을 베푼 덕일까. 이달 20일 대구등산학교 강의를 위해 대구를 찾은 김 씨는 유난히 행복해 보였다. 등산복 차림으로 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얘기하는 모습이 마른 몸매와 온화한 인상과 달리 큰 산을 품고도 남을 만큼 넉넉했다.

실제 그 사건 이후 그의 산악 인생은 해피엔딩을 향하고 있었다. 2006년 파키스탄의 가셔브룸 1봉(8,068m)과 2봉(8,035m) 연속 등정에 이어 2007년 여름 세계 제2위 봉인 K2(8,611m)와 브로드피크(8,047m) 연속 등정에도 성공했다. 2008년에는 네팔 마칼루(8,463m) 무산소 등정과 로체(8,516m) 무산소 최단시간 등정 세계기록을 세웠다. 또 마나슬루(8,163m)와 다울라기리(8,167m)도 올랐다. 2010년에는 네팔 칸첸중가(8,586m) 등정에 성공한 데 이어 지난해 네팔 히말라야에 남은 최고 높이의 미등봉인 힘중(7,140m)을 세계 최초로 올랐다.

8천m 이상 14개 봉 중 13개를 발아래 두게 된 셈이다. 산이 좋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산악인으로 우뚝 서게 됐다.

올해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 무산소 등정에 나선다. 이미 사전 답사를 마치고 다음 달 11일 파키스탄으로 떠난다. 이 도전에 성공하면 그는 아시아 최초 히말라야 8천m급 14좌 무산소 완등 기록과 함께 최단 기간 14좌 완등 기록도 세우게 된다. 그가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한국 산악계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번 산행에서는 무산소 등정에 이어 무동력으로 등정에 나선다. 통상 해발 2,800m 루크라까지 항공기로 가는데 이번에는 인도 벵골만 해발 0m부터 베이스캠프(5,360m)까지 카약(160㎞)과 자전거(1천㎞), 도보(150㎞)로 이동한 뒤 무산소 등정에 나선다.

기록을 세우겠다는 욕심이 아니다. "애초부터 14좌 완등을 목표로 한 것도 아니에요. 에베레스트는 2007년에 도로공사팀이랑 갔는데 마지막 캠프까지 올랐다가 다른 한국 원정대 2명의 추락사고 소식을 듣고 수색작업을 돕기 위해 내려왔어요."

김창호 대장. 경북 예천 출신 산악인. 매일신문DB
김창호 대장. 경북 예천 출신 산악인. 매일신문DB

◆세계의 지붕에서 얻은 '절대 자유'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다 해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한국에서도 여성 산악인인 오은선 씨를 포함해 여러 명이 성공했다. 그러나 무산소로 그것도 무동력으로 등반하는 것은 세계 산악계에서도 드물다. 힘들고 어려운 고산 등정도 모자라 왜 힘든 무산소 등정을 고집할까?

"최근 상업적인 등반이 확산되고 있는데 대부분 에베레스트산을 비롯해 쉽게 접근 가능한 봉우리들을 목표로 해 8천m급 산들을 '수집'(?)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라져 가는 등산의 순수성과 낭만을 되찾고 싶습니다."

유산소 등정이나 기업체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우리 산악계의 풍토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많은 사람이 오직 오르는데 목표를 두고 있어요. 과정이 아니라 성취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셈입니다. 8천m급 14좌를 등정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산악인들은 어떻게 오르느냐보다는 등정 자체를 목표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힘들게 오르는 만큼 정상에 섰을 때의 느낌은 남다를 것 같았다. "별다른 느낌이 없습니다. 산소가 부족해 사고력이 많이 떨어져 그냥 기계적으로 움직이지요. 정상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는 게 전부입니다. 흔히 말하는 정복감, 희열감보다는 그냥 산이 나를 허락해줬다는데 감사하고 안도할 뿐이지요. 참. 하산하기 전에 담배 한 개비는 꼭 피웁니다."

대자연에 대한 경외감, 역경을 딛고 목표를 성취한 정복감, 뭐 이런 대답을 기대했는데 싱겁다. 게다가 담배까지 입에 문다고 하니.

◆산에 빠지다

"멀리 떠돌아다닐 팔자로구나." 수십 년 전 경북 예천의 한 시골마을. 마을 어귀에서 뛰어놀던 소년 김창호에게 지나가던 노스님이 불길한(?) 예언을 내렸다. 깜짝 놀란 부모는 액땜한다며 아명을 짓고 부적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스님의 예언은 적중하고 만다.

학창시절부터 타고난 지구력을 자랑했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소년의 독무대였다. 핸드볼 선수를 지내면서 지구력은 물론 근성까지 다졌다.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초'중'고교 시절 내내 학급에서 10등 안에 들 정도였단다. 1988년 서울시립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 때 '놀러나 다녀볼까' 싶어 별생각 없이 산악부에 들었다. 선배들과 이곳저곳을 재미삼아 다니다 보니 어느새 등산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군 복무는 해병대에서 했다. 그곳에서 특수수색 임무를 맡았다. 죽을 고생을 했단다. 이때의 경험은 그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힘든 훈련을 겪으면서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는 법과 인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후 등정에서 어려움을 만나도 이때의 경험과 생존훈련이 큰 도움이 됐지요."

1998년 선후배와 함께 아웃도어용품 유통회사를 차렸다. IMF 외환위기 직후였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나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대한 갈증이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술만 마시면 자꾸 히말라야의 풍경이 생각났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뛰었지요. 불면의 밤이 이어졌고 등산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어요. 결국, 파키스탄행을 결심했죠. 어차피 갈 거면 지금 당장 가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행을 닮은 등산

정복을 위해 오르는 것이 아니다. 김 씨에게 등산은 '~ing'가 아니라 삶의 쉼표에 가깝다.

"극한을 좇는 수직 여행(고산 등반)보다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수평 여행(탐사)에 더 마음이 가요. 기술(인터넷)의 발달로 공간적 여행의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지요. 결국, 내가 가서 느끼고 체험하는 맘속의 여행이 중요한 시대가 온 거죠."

그런 의미에서 산문을 나서는 스님들의 만행(萬行)을 닮았다. "서양에서는 등산이라고 하지만 동양에서는 입산이라고 하지요. 산에 들어갈 때 목욕재계를 하고 천천히 걸으며 주변 경치를 구경하다 보면 그동안 지나치던 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지요."

그는 느림을 등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는다. "느리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아요. 요즘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외치고 바쁘게 살다 보니 진정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을 못 보는 것 같아요."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다 보니 결혼도 대학졸업도 모두 남들보다 한참 늦었다. 지난해 결혼에 골인했고, 22일 입학 25년 만에 졸업했다. 한 번 등산에 몇 개월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보니 연애나 학과 공부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앞으로 히말라야 탐사와 연구에 매진할 생각이다. 그것도 천천히 꾸준하게."히말라야 탐사는 평생을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죠. 나에게 등반은 학문이기도 합니다. 집에 가면 등산복은 몇 벌 없어도 히말라야와 관련된 자료는 엄청 많아요. 1억원 이상 되는 희귀본도 상당수 있습니다. 원정 가면 헌책방 돌며 자료 사들이는 것이 유일한 취미생활입니다."

최창희 기자 cchee@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김창호 대장
김창호 대장

◆김창호는=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예천 덕율초등학교, 감천중학교, 영주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시립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파키스탄 히말라야에 관한 한 독보적인 탐험가로 통한다. 1993년 파키스탄 그레이트 트랑고타워 완등을 시작으로 20년간 히말라야 8천m급 봉우리 13개를 모두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고 등정했다. 지난해에는 네팔에 남은 가장 높은 미등정봉인 힘중(7,140m)을 세계 최초로 등반해 '산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황금 피켈 아시아 상'을 받았다. (사)한국대학산악연맹 이사, 한국고산거벽등산학교 수석강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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