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회별신굿탈놀이 등재로 '세계유산 그랜드슬램' 달성
2. 유네스코와 세계문화유산 보존
3. 하회별신굿탈놀이,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잰걸음
4. 하회별신굿탈놀이, 가장 완벽한 민족문화 정수
5. 하회탈·하회별신굿탈놀이, 한국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
6. 한국의 탈춤-산대놀이 등 중부 이북 탈춤
▶7. 한국의 탈춤-야류놀이 등 중부 이남 탈춤
8. 지구촌의 탈과 탈춤-아시아의 탈춤
9. 지구촌의 탈과 탈춤-한·중·일 탈춤
10. 한국의 탈춤, 인류무형문화유산을 위한 제언
경남에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에서 전승돼 온 탈춤을 '야류'(野遊)라 부르고, 서쪽 지역에서 전승돼 온 탈춤을 '오광대'(五廣大)라 부른다. 야류와 오광대의 발생지는 낙동강변인 초계 밤마리(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라고 전한다. 밤마리의 시장에서 대광대패라는 유랑예인집단이 여러 공연물 가운데 하나로 탈춤판을 벌였다.
◆야류의 유래, 밤마리 대광대패에서 농경의례설까지
야류의 유래설은 1933년 민속학자 송석하(1904∼1948, 8·15광복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국립민속박물관을 설립)가 논문 '오광대소고'에 구전 자료를 정리해 발표한 것이 처음이다.
1870년 무렵에 밤마리에 가 있던 부산 수영 사람이 대광대패의 오광대를 보고 와서 수영야류를 시작했고 동래읍은 수영의 것을 본받아 약 60년 전에 동래야류를 개시했다.
수영야류 유래설과 관련해 1970년대에 들면서 1770년 무렵 경상좌수영의 수사가 군졸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밤마리 대광대패를 데려다가 연희한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 들면서 농경의례 유래설이 제기됐다. 앞서 언급됐던 시기는 근대로의 변환기로 전통사회의 탈춤이 처음으로 시작됐다는 말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광대와 야류를 같은 종류로 보고 오광대의 전파설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오류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수영야류, 보름날 낮부터 시작해 집단무와 길놀이에 이은 탈놀이
'수영야류'(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는 1935년까지 놀아지다가 일제가 집단적 모임을 금지하면서 전승이 중단됐다가, 광복 이후 수양반 예능을 보유했던 고 태명준(1979년 작고) 선생에 의해 복원과 전수가 주도돼 1971년 2월 24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전승되고 있다.
놀이 준비는 정초부터 시작하는데 정초 3, 4일경 야유계(野遊契)가 주동이 되어 집집을 돌며 지신(地神)밟기를 하고 전곡(錢穀)을 거둬 경비를 확보한다. 한편에서는 놀이에 사용할 탈을 제작한다.
경비·가면·의상 등의 준비가 완료되면 14일 밤에 제각기 연습한 연기를 원로들 앞에 보이고 자기 배역을 확정받는 절차인 '시박'(試瓠)을 가진다. 보름날 낮에는 분장을 한 수양반(首兩班)이 주축이 된 산신제가 베풀어지고 이어 우물고사·최영장군 묘에 묘제를 지낸 뒤 달이 뜨면 본격적인 놀이에 들어간다.
놀이는 화려한 길놀이와 전체 4마당으로 구성된다. 맨 앞에 등(燈)을 든 아이들이 서고 이어 농악대·길군악대·팔선녀(八仙女)·수양반·말뚝이·난봉가패 등의 순으로 서서 놀이마당에서 약 1km 떨어진 수영강변에서 시작한다.
놀이판에 이르면 농악대의 흥겨운 농악에 맞추어 종이탈을 쓴 관중들이 무대에 뛰어올라 집단 난무(亂舞)를 벌인다. 농악놀이가 3~4시간 계속되고 나서 흥이 가라앉을 무렵, 수양반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탈춤판이 시작된다.
전체적인 주제는 대부분의 탈춤과 같이 양반에 대한 반감, '일부처첩'(一夫妻妾)에서 발생하는 가정문제, '벽사의식'(辟邪儀式) 등을 다루고 있으며, 마당 간의 연결을 고려하지 않은 구성이다

◆동래야류, 마을단위 줄다리기 끝나면 시작해 새벽녘 탈놀음
'동래야류'(국가무형문화재 제18호)는 1935년에 중단됐던 놀이를 곽상훈, 유영준, 허영호 등 지식 청년들이 주도해 재연했다.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을 전후해 열렸다. 장터나 타작마당·시냇가 같은 야외에서 연희되며, 그 해의 연중무사(年中無事) 및 풍년을 기원했다.
동래야류는 일제 강점기에 맥이 끊어졌다가 1965년부터 본격 복원되기 시작했다. 부산 동래 출신 춤꾼인 고 문장원(1917∼2012) 선생이 복원을 주도하고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끌어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정월 3, 4일경 각 마을의 농청(農廳)을 중심으로 조직된 농악대가 집마다 돌면서 지신(地神)을 밟고 걸립(乞粒)을 한 뒤 얻어지는 돈과 곡물, 유지들의 기부를 받아 공연에 쓰일 비용으로 확보하면서 시작된다. 이때부터 길놀이에 쓰일 등(燈)을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등장할 배역을 정해 연습에 들어간다.
탈놀이는 15일 마을 단위의 줄다리기가 끝난 뒤 크게 벌어지는데 이는 해질 무렵의 길놀이로부터 시작된다. 청사초롱을 든 2명의 장정 뒤를 그해의 간지등(干支燈)과 오색등 500여 개가 따른다.
놀이판에서 학춤·곱추춤·문둥이춤·궁둥이춤·구불춤·홍두깨춤 등의 갖가지 춤판이 벌어진다. 이때 구경꾼 누구나 마음대로 들어가 자신이 만든 탈을 쓰고 재주를 자랑할 수 있다. 이 군무(群舞)는 새벽 1시경 탈놀음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된다. 춤추던 사람들이 물러나면 본격적 탈놀음이 시작된다.
새벽녘에 놀이를 마치면 탈을 모아 놓고 불사르면서 여러 번 절을 하며 '탈 소각제'를 올리고 야류를 모두 마친다. 탈놀음은 문둥이 마당, 양반마당, 영노마당, 할미마당 등 4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경상남도 일대에 분포 전승돼 온 통영·고성·가산오광대
오광대류 탈놀이는 경상남도일대에 분포하는 산대도감계통극의 한 분파인 영남형 탈놀음이다. 발생지는 낙동강변의 초계 밤마리 장터라고 일러온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견과 논란도 있다. 오광대가 산대도감극 형성 초기의 분파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오광대라는 이름은 오행설(五行說)에 의거한 오(五)로서, 진주와 가산의 오광대에는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가 처음에 추어져서 오행과 벽사관념(辟邪觀念)에서 '5'가 연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진주오광대에서는 문둥광대도 다섯을 등장시키고 있고 문둥이탈은 오방색인 청(靑)·백(白)·적(赤)·흑(黑)·황(黃)으로 만들었으며, 통영과 고성오광대는 다섯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밤마리 현지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약 70년 전의 밤마리오광대는 대광대패의 '죽(竹)방울받기'의 곡예부터 시작해 관중이 모이면 말뚝이가 나와 양반마당을 놀고, 이어 '비비새'(영노), '중과 각시의 춤', '할미와 영감과 지대각시놀이'가 있었고 '사자'도 등장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내용은 현존하는 오광대의 내용과 동일한 마당이 당시에 이미 정립돼 있었음을 알게 한다. 주된 내용은 벽사의 의식무(오방신장무), 양반에 대한 모욕, 파계승에 대한 풍자, 일부와 처첩의 삼각관계에서 오는 가정비극, 축사연상(逐邪延祥)의 축원무(사자춤) 등이다.
오광대 가운데 지금은 '통영오광대'(국가무형문화재 제6호), '고성오광대'(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가산오광대'(국가무형문화재 제73호) 등이 지정,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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