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 대한민국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한 이들은 전국적으로 3만1천827명에 이른다. 대구에도 북한이탈주민 677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막연한 거부감과 차별, 근거 없는 편견 등은 이들의 삶을 옥죄고 낯선 이방인으로 떠돌게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이 고향에서의 삶과 한국에서 맞이한 새로운 인생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자서전 공유회가 19일 열린다. 자서전은 대구에 사는 북한이탈주민 8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대구하나센터가 마련한 이날 행사는 '높바람이 실어온 당신의 향수이야기'를 주제로 진행된다. '높바람'은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뜻한다. 행사에 참여하는 두 명의 '대한민국인'을 미리 만났다.
◆세상 밖으로 안내한 이웃들의 관심
2011년 아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넌 유애선(70·여) 씨는 한국을 '내 나라'라고 불렀다. 그동안 유 씨는 '있어도 없는 사람'을 자처했다. 북한이탈주민이 으레 경험하는 차별 섞인 시선에 스스로를 드러내길 꺼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다"면서도 "조금의 차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고 했다.
유씨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이 있다. 2014년 며느리와 함께 탈북을 시도했던 손녀(13)가 두만강을 건너다 깨진 얼음 아래로 빠졌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끝내 만나지 못했다"는 유 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움츠려있던 유 씨를 세상 밖으로 인도한 건 이웃의 관심이었다. "이웃들이 명절만 되면 찾아와 이야기를 건넸죠. 정말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유 씨에게 한국은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곳'이다. 2009년 먼저 탈북한 딸 순옥(46) 씨와 전국을 여행하는 것도 큰 기쁨이다. 최근에는 집 근처에 조그만 텃밭을 가꾸며 채소를 수확하는 취미도 생겼다. 유 씨는 "북한에선 국영 정미소에서 일하며 월급 100원을 받고, 알사탕 파는 부업을 해도 생계유지가 힘들었다"며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고 했다.
◆차가운 시선 적응 어려워…그래도 자유로운 한국 좋아
2009년 한국에 온 최우건(71) 씨는 북한에서 나름 '잘 나가는'사람이었다. 금속류 도매업을 했지만 불안감은 늘 그를 옥죄었다. 최 씨는 "모든 것은 '비공식'이었다. 들키면 그 길로 끝장이라는 불안에 떨었다"고 했다. 그는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고 싶었다"고 했다.
어렵게 시작한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일하고 싶어도 기초수급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으려면 소득이 없어야 했다. 고령에 병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마땅치 않았다. 매달 50만원을 쪼개 생활하는 현실은 최 씨의 기대와는 달랐다.
가장 힘든 건 주위의 시선이었다. "일상에서 차별은 항상 존재했지요. " 다소 어두웠던 최 씨의 표정은 대구하나센터 얘기가 나오자 달라졌다. 최 씨는 "그분들이 항상 웃는 얼굴로 찾아와 가족같이 대해줬다. "이제는 나도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이야기하게 됐다"며 웃었다.
한편 자서전 공유회는 19일 오후 6시 대구 중구 공감게스트하우스 1층에서 열린다. 이후 토크쇼와 북한음식 및 북한문화 체험도 있다. 조재희 대구하나센터 센터장은 "대구 시민과 북한이탈주민이 경계를 나누지 않고 서로 어울리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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