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리다."
1762년 임오년 윤5월 13일. 세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결국 아들(사도세자)을 뒤주에 들어가게 하고 뚜껑을 덮었다. 이어 세손을 업고 들어온 세자의 호위무관 이석문(李碩文)으로 하여금 뒤주 뚜껑에 큰 돌을 올려놓으라고 재차 명하지만 석문은 끝내 어명을 따르지 않는다. 이튿날 영조는 친히 석문을 국문해 곤장 50대와 함께 삭탈관직했다.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북비고택(北扉故宅·2013년 성주 응와종택(凝窩宗宅)으로 개칭·경북민속자료 제44호)은 한개마을 성산이씨의 발상지이다. 조선 초 성산이씨가 한개에 입향할 당시의 종택이 있던 곳이다. 이석문이 참혹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북쪽으로 문을 내고 매일 예 갖춰면서 "시류에 아첨하는 무리들과 접하기 싫다"고 하니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북비공(北扉公·이하 공)이라고 불렀다. 대문채 안쪽 바로 우측에 북비(北扉)라 편액된 북향의 일각문(一角門)이 있는데 사도세자를 향한 공의 마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공은 영조26년(1750년) 영조를 대신해 정무를 보던 사도세자가 38세의 그를 특별히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발탁했다가 다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후 공은 세자의 지위가 불안함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낙향했다.
북비고택은 공의 손자 규진이 순조21년(1821년) 정침을 신축하고, 증손자 공조판서 원조가 헌종11년(1845년) 사랑채인 사미당(四美堂)과 경침와(警枕窩)를 갖추고 폐허가 된 북비채를 중건해 오늘날의 규모를 이루었다. 고종36년(1899년) 대문을 솟을대문으로 증축하고, 순종4년(1910년) 사당을 증축하는 등 몇 차례 증·개축을 했다.
충절과 문한이 면면히 이어온 북비고택은 현재 정면 6칸인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북비채, 대문채 등 6채로 구성돼 있고, 북비채는 별도의 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원래 북비채에 있었던 장판각과 안대문채, 아래채, 마방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한개마을 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쪽으로 북비고택의 대문 진입로가 나타난다. 가옥의 초입에 둥근 돌에 '북비고택'임을 나타내는 비석이 있고, 이어 매우 중후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주는 대문채가 나타난다. 비교적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상류층 양반의 한옥으로 한옥주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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