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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정신 대구경북의 '얼'<16>경북 유림들의 파리장서 그리고 일제의 탄압

대한민국 독립을 희망하며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유림단의 독립청원서. 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대한민국 독립을 희망하며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유림단의 독립청원서. 독립운동기념관 제공

파리장서는 유림들의 노력과 희생 끝에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는 한국의 진정한 독립의사를 세계만방에 밝힌 역사적인 사건이다. 또 국제적으로는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표방했고 일본에게는 한국의 독립을 포고한 것이다. 파리장서는 3·1운동 직후 일부 유림 등이 앞장 서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혹은 평화회의)에 한국을 독립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을 담아 보낸 긴 편지(독립청원서)다.

이러한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의 숫자에 대해 이견이 있지만 137명이라는 추정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들의 출신지 분포를 보면 경북이 62명(44.6%)으로 가장 많았고, 경남 42명(30.7%), 충남 18명(13.1%), 전북·전남 각 4명(2.9%) 등으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 경상남북도를 합한 경상도 출신 유림은 104명으로 전체의 75.2% 달한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중 경상도 출신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은 파리장서운동이 경상도 유림에 의해 주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상도 인사가 많은 만큼 일본의 탄압도 경상도 유림이 가장 많이 받았다.

◆탄압에도 굴하지 않던 유림들

파리장서와 관련된 다수의 인사들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탄압을 받았다. 그들은 장기간 구금된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하거나 재판을 받고 징역을 살았으며, 심지어는 옥중 질병의 후유증으로 숨진 사람도 있었다.

파리장서운동은 성주지역 3·1만세운동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됐다. 1919년 4월 2일 성주시장 만세운동은 송준필의 조카 송회근을 비롯해 서명자인 유생 이봉희, 이기정, 성대식 등이 주도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조사 과정에서 파리장서운동 계획이 탄로났다.

파리장서운동으로 가장 먼저 체포된 사람은 4월 5일 붙잡힌 공산 송준필이었다. 곧이어 4월 9일에는 장석영, 이덕후, 성대식 등이 체포됐다.

곽종석도 4월 13일 가택 수색을 당한 뒤 4월 18일 거창헌병대에 의해 검거됐다. 김창숙이 파리장서를 가지고 용산역을 떠난 지 20일만의 일이다. 서명자들 대부분은 파리장서운동에 가담한 사실을 인정하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송홍래는 가족들이 피신을 권했지만 "자신이 아는 것은 의리일 뿐 화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고 말하며 당당히 붙잡혔다. 김황의 부친은 아들에게 "선비가 선비인 까닭은 오직 곧음에 있으니 구차하게 체포를 피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파리장서운동 관련자에 대한 체포는 6월 하순경 김창숙이 국내 향교에 발송한 것으로 보이는 '파리장서 한문본'이 발각되면서 본격화 됐다. 파리장서 서명자인 '기미유림단' 137명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로 서명자와 협조자 수백 명이 체포됐다.

파리장서운동 관련자에 대한 1·2심 재판 결과 18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는데, 실형을 받은 인물은 곽종석(징역 2년), 김복한(징역 1년), 이봉희(징역 10월), 우하교(징역 6월) 등 4명 뿐이었다. 나머지 인사들은 '정상 참작'으로 집행유예를 받거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됐다.

파리장서 운동의 핵심인 면우 곽종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하기도 한 이름난 유림이었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파리장서 운동의 핵심인 면우 곽종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하기도 한 이름난 유림이었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곽종석과 김복한은 137명의 서명자 가운데 1·2위 순위로 서명한 인사이며, 이봉희는 서명에도 참여하고 3·1운동에도 참가했다. 우하교는 서명에 참여한 뒤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독립청원운동에도 참여했다.

특히 곽종석은 74세의 나이에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 수감된 뒤 폐결핵으로 7월 21일 형 집행정지로 출감했으나 그해 10월 17일 생을 마감했다.

◆경북지역 군별 서명자

경북지역 출신의 파리장서 서명자는 14개 군에서 62명이 참가한 것으로 파악된다. 군별로는 성주 15명, 달성 11명, 봉화 9명, 고령 6명, 안동 5명, 김천 4명, 영주 3명, 대구와 경주 각 2명, 그 외 영양·의성·선산·청도·영천에서 각 1명씩이었다.

성주에서는 배종순, 성대식, 송준필, 송홍래, 이계원, 이계준, 이기정, 이기형, 이덕후, 이만성, 이봉희, 이인수, 이현창, 장석영, 정재기 등 15명(24.2%)이 서명해 군단위로는 그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성주는 파리장서운동의 핵심 세력인 김창숙의 향리이고, 주요 서명자인 장석영, 송준필의 거주지였다. 또 곽종석, 장석영의 스승인 한주 이진상의 향재가 있는 곳이며, 사미헌 장복추가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성주지역은 실제로 파리장서운동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11명이 서명한 달성군은 지금의 대구광역시에 속해 있으므로 대구의 서명자는 이종기, 서건수, 김용호, 박순호, 박재근, 우경동, 우성동, 우승기, 우찬기, 우하교, 우하삼, 이복래, 조석하 등 13명으로 볼 수 있다. 이 중 우경동 등 6명은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의 단양 우씨 문중의 인사들이다.

지난 2014년 조성된 봉화 파리장서운동 기념비 모습. 봉화군 제공
지난 2014년 조성된 봉화 파리장서운동 기념비 모습. 봉화군 제공

봉화에서는 김건영, 김창우, 김순영, 권상익, 권명섭, 권병섭, 권상원, 권상도, 권상문 등 9명(14.5%)이 서명했다. 권명섭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김창숙을 대신해 봉화 일대 안동 권씨 문중의 서명을 독려했다. 그 결과 안동 권씨 문중에서 7명의 서명자가 나왔다.

고령에서는 곽걸, 곽수빈, 윤양식, 이병회, 이상희, 이인광 등 6명(9.7%)이 서명했다. 이곳은 달성과 가까운 곳으로 곽종석, 이승희, 서찬규 학맥이 혼재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동에서는 류필영, 이만규, 류연박, 김양모, 김병식 등 5명(8.1%)이 서명했다. 서파 류필영은 정재 류치명의 문인이고, 류연박은 정재 류치명의 손자, 이만규는 예안의병 창의장 향산 이만도의 동생이다.

김천에서는 최학길, 이경균, 이석균, 이명균 등 4명(6.5%)이, 영주에서도 김택진, 정태진, 김동진 3명(4.9%)이 서명했다. 경주에서는 손진창, 손병규 2명(3.2%)이, 영양(이돈호), 의성(권상두), 청도(김정기), 선산(이능학), 영천(정재호)에선 각 1명(1.6%)이 서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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