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옛 땅에서 통곡하고 싶다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요동(遼東)과 간도(間島).'

우리에게 남다른 지역이다. 역사에서 옛 조상들이 누빈 곳이자 삶터였다.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를 살펴도 그렇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흔적을 훑어봐도 다르지 않다. 두 지역은 우리나라 유입 외래 종교와도 인연이 깊다. 100년 넘는 세월을 가진 한국 천주교이다.

특히 요동은 우리에게 '소리 내 울 수 있는 곳'(好哭場) 즉 통곡할 수 있는 좋은 장소로 잘 알려졌다. 조선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글 덕분이다. 1780년 7월, 연암은 청나라 사절단 일행에 끼어 1737년 태어나 자라고 줄곧 지냈던 비좁은 조선을 떠나 생애 첫 중국 나들이에 나섰고 압록강을 건너 들과 강의 산악지역을 지나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눈앞에 끝없이 드넓게 펼쳐진 벌판 즉 요동벌을 만나서다. '1천200리가 사방에 산 한 점이 전혀 없어 하늘가와 땅끝을 아교로 붙이고 바느질로 박은 듯'하고 '구름만 아득'했으니 그럴 만도 했을 터이다. 나라를 바꿀 만한 포부를 가졌으나 산들이 촘촘한 갑갑한 땅, 조선의 산하와 썩어빠진 나라를 생각하면 할 말을 잃고 통곡하고 싶었을 것이다.

요동들은 이미 숱한 조선의 관리들이 거쳤다. 그들도 연암처럼 고구려인이 수(隋)와 당(唐)의 군대와 격돌하며 지킨 '우리 땅' 요동에 얽힌 역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게다가 연암은 왜란(倭亂)과 호란(胡亂)까지 겪은 뒷사람이었으니 오죽했으랴. 선조 발자취가 서린 요동벌을 '호곡장'이라 읊으며 통곡하고자 한 심사를 그저 짐작할 뿐이다.

간도 역시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진 중첩된 역사를 갖는 유서 깊은 땅이다. 비록 일제의 대륙 침탈 야욕의 결과인 1909년 간도협약으로 또다시 잃어버린 아픈 역사를 가졌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안마당처럼 누볐던 고토(古土)였다. 숱한 우리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 땅을 일구고 가꾼 옥토(沃土)였다.

천주교는 이런 요동과 간도를 깊이 살폈다. 한국을 발판으로 요동과 간도는 물론, 바다 건너 일본, 류큐, 대만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계획에서다. 천주교 불모지로 미개척지나 다름없었던 동아시아에 천주교 '복음의 빛'을 전하는 일이 당시 천주교의 당면 현안으로 떠올랐고, 한국과 요동·간도를 잇는 연결망은 더없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결국 천주교 내부 사정으로 요동은 빠지고 간도만 1920년 서울에서 분리 설치된 원산대목구라는 교구에 포함됐지만 함경남북도를 포함한 그 면적(20만5천㎢)이 남북 강산(22만㎢)에 버금가는 관할지역을 가졌다. 당시 제작된 이런 천주교 지도는 세월이 흘러도 간도가 한국 백성들의 옛 삶터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하는, 우리로서는 남다른 의미다.

이런 옛 천주교 역사 탓인지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이 "북한으로부터 공식 방북 초청장이 오면 무조건 응답을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다"고 한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게다가 지난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교황의 평양 방문을 제안했지만 이뤄지지 못한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북한 방문은 현재 진행되는, 남북한을 둘러싼 평화 정착 노력의 흐름에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다. 종교적인 새 길도 나겠지만 다른 길 역시 만들어질 터이고, 개인적으로는 그 새로운 길을 따라 옛 땅 요동이나 간도에서라도 통곡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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