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묘비명,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입니다. 바라지 않으니 두렵지 않은 거지요? 바람과 기대는 중력이어서 바라는 것이 있으면 조바심이, 두려움이 생기고, 기대하는 것이 있으면 거기에 묶입니다. 쥐고 있는 것,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질퍽거리는 진흙탕에서 지지고 볶고 뒹굴다 하늘을 향해, 자유를 향해 날지 못하고 푸덕거리기만 하는 이유겠습니다.
바라지 않음, 내려놓음, 자유를 훔쳐본 자의 세상입니다. 가진 것이 오히려 비상을 방해하는 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경지가 있나 봅니다. 거지처럼 살아도 왕처럼 부러운 것이 없는 경지! 오히려 왕처럼 가진 것이, 평범하지 않은 것이, 이젠 버겁다고 스스로 가진 것을 내려놓게 되는 경지….
홍콩 배우 주윤발이 8천100억원이나 되는 재산을 모두 기부했다고 합니다. 김제동의 말대로 영웅이 본색을 드러내 보인 거지요? 영웅의 본색은 영웅이 아니라 현자였습니다. 그의 향기가 천 개의 바람이 되어 향기로 흩어집니다.
행복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그가 어찌 "대단하다"는 찬사를 바라고 한 일이겠습니까? 작은 재산도 움켜쥐고 놓지 않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며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는 선한 일을 한다는 마음도,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려놓은 게 아니라 빼앗기는 것일 테니까요.
그런데 평생 모은 재산을 넉넉히 그리고 선선히 내려놓을 수 있는 그 마음은 어떻게 가능한 거지요? 8천 100억원, 그의 평생이 얼마나 화려하고 잘 나갔나는 보여주는 금액의 돈입니다. 동시에 겉으로 드러난 그의 평생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 평생을 한 순간에 내려놓으며 조용히 그 돈은 내 돈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거지요? 영혼에서 나온 말, 어쩌면 자기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인지도 모르는 말입니다.

꽤 부자로 소문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겐 아들이 있었는데 언제나 부잣집 아들이라는 수식어만 따라다니는 아들이었습니다. 혼인 시장에서 그것은 중요한 조건이었나 봅니다. 여기저기서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마침내 그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상대는 아마 그 사람이 부자라는 것을 아는 지인의 조카였습니다. 그들의 혼인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얼마 되지 않아 소문이 돌았습니다. 여자 쪽에서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하며 이혼을 요구했다는 거였습니다. 부를 보고 결혼하고 나면 부만 가지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모양입니다. 남자의 어머니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한 말은 중매를 했던 지인이 했다는 이 말이었습니다.
"뭐 그 재산이 자기 것인가, 다 하나님이 주신 거지."
돈이 돈이 아니라 자기의 열정이고 울타리이고 사랑일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열려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흘러 누군가의 밥이 되고 일이 되고 힘이 되는 돈은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돈이 돌아 돈"이라며 나눠쓰자고 덤비는 이를 만나면 턱, 기가 막히는 일이지요? 그것은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는 거니까요.
"하나님이 주신 거야, 나는 잠시 맡아가지고 있는 거고." 라는 말은 내려놓은 자의 깨달음일 때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멀리멀리 퍼져가지만 빼앗는 자의 욕심을 때는 약도 없습니다. 표적일 뿐이니까요.
"그 돈은 내 돈이 아닙니다." 주윤발의 말이 여기저기서 꽃으로 피어납니다. 주윤발이 말합니다. "돈은 행복의 원천이 아닙니다." 그 상식적인 말에 힘이 붙는 건 그가 삶에서 건져 올린 지혜의 말이기 때문이지요?
돈이 행복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또 알고 있지요? 돈이 없어 행복하기는 어려운 법이라는 사실을. 돈이 없어 무시당하고, 돈이 없어 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일이 의외로 많은 법이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러셀의 저 문장을 좋아하나 봅니다.
"돈이 있다고 품위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는 사람이 품위 있게 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소득이 높을수록 행복지수가 높다는 여론조사는 러셀의 생각을 지지해 주는 거지요?
자본주의를 사는 많은 우리들은 돈이 없어 하지 못하는 일의 공포 때문에 돈,돈,돈 하다가 돈의 권력에 사로 잡혀 자유인이 되지 못하고 수인으로 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니 또 그에 대한 짝으로 돈을 권력으로, 남을 통제할 수단으로 쓰는 것이 버릇이 된 사람들도 종종 봅니다.
세상을 향해 '나'를 열고 걸어 나가야 하는 젊은 날은 '성취'가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펼치는 집을 짓고 세상에 거점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젊다는 건 자신의 열정 따라 열정을 쏟아내며 성장하는 겁니다. 그 때는 돈이, 열정이, 관계가, 명예가, 직장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이 든다는 것은 뭘까요? 어느 새 젊음이 저만치 가고 나의 집이라 여겼던 것이 나를 떠납니다. 젊음이 떠나고 열정이 떠나고, 기억력이 떠나고, 건강이 떠납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그동안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열심히 살며 공들여 쌓아왔던 업적들이 소리 소문 없이 떠납니다. 그러면 성취가 아니라 성찰이, 무엇보다도 자기 성찰이 과제지요?
주윤발이 말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돈을 얼마나 버느냐가 아니라고. 진짜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남은 인생을 평화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잘 살 수 있느냐, 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의 화두가 보이지요? 몇 줄 안 되는 주윤발의 글에서 그가 참 기분 좋게 나이 들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무료하지 않게 존재하기, 일 없이도 자기를 괴롭히지 않고 자기와 잘 지내기, 그렇게 늘 평안하기, 그것이 나이듦의 과제인 것은 아닐까요?
나이 든다는 것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잘 나이 든다는 것은 나를 떠나고 있는 것을 잘 놓아주는 것입니다. 사그러드는 자기를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는 계절의 변화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할 일은 충분하다고 했던 소로우의 말이 진짜 자유인의 말이라는 걸 조금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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