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2월 27일 밤 경북고 이대우 학생의 집에는 10여 명의 학생들이 자정을 넘기도록 구수회의(鳩首會議)를 거듭했다. 하청일이 가져온 선언문 초안을 정서하면서 방안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마지막 남은 학생들은 비장한 결의를 주고받았다. "살아남으면 고향에 가자" "천당에서 만나자".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여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주도했던 건국 이후 최초의 민주화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직접적인 발단은 2월 28일로 예정된 야당 부통령 후보의 수성천변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대구의 8개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학생 대표들이 학교별 학급별 긴급회의를 열고 부당성을 지적하며 일요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격앙된 학생들에게 '무언가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교실마다 토론이 벌어지고 울분을 토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학생회 간부들에게 '결정을 하라'는 촉구가 거셌다.
경북고·대구고·경북대사대부고 학생 대표가 모인 2·28 데모의 산실은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관제 시위에 동원된 경험이 전부였을 뿐, 거리로 뛰쳐나가 데모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많은 학생들의 안위가 걸린 문제였고 교사들의 거취도 마음에 걸렸다. 당시 고등학생이면 지식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책임감이 지금과는 달랐다고 하나, 그래도 17, 18세 청소년들이었다.
상대는 기세등등한 자유당 정권이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을까. 그러나 학원을 정치 도구화 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24일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와 매일신문이 주최한 민주화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학생 간부 몇몇이 선동을 하거나 유도를 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저마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활화산처럼 분출한 것이라고 했다.
시위 준비를 끝내고 친구의 방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28일 새벽을 맞이했던 대구의 까까머리 소년들. 그 어깨 위에 드리워진 역사의 무게감이 어떠했을까. 그 공포를 이기고 일어선 용기와 희생정신이 2·28 민주운동을 일으키며 4·19혁명의 횃불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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