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산책] 공연히 많기만 해-이조년

눈 속 매화, 서리 속 국화 외에는 모두 잡꽃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 꽃 저 꽃 주섬주섬 더 심지 말자꾸나 爲報裁花更莫加(위보재화갱막가) 꽃이 백 가지면 됐지 더 심어서 무엇 하나 數盈於百不須過(수영어백불수과) 품격 높은 눈 속 매화, 서리 속 국화 말곤 雪梅霜菊淸標外(설매상국청표외) 울긋불긋 마구 핀 꽃 공연히 많기만 해 浪紫浮紅也謾多(랑자부홍야만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一枝) 춘심(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말의 시인 이조년(1269-1343)이 지은 '다정가'(多情歌)다. 위의 한시는 바로 그 '다정가'(多情歌)의 작자가 백가지 꽃을 심어놓았다는 성주의 동헌(東軒) 백화헌(百花軒)에서 지은 작품이다. 보다시피 화자는 매화와 국화의 고매한 절조를 몹시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대목에서 작자의 드높은 품격을 느낄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매화와 국화를 제외한 다른 꽃들은 '울긋불긋 마구 핀' 쓸 데 없는 것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있다. 특정 꽃들을 아주 각별하게 사랑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에 해당되지만, 그 나머지 꽃들을 무시할 자유는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1)'풍상(風霜)이 섯거친 날에 갓 픠온 황국화(黃菊花)를/ 금분(金盆)에 가득 담아 옥당(玉堂)에 보내오니/ 도리(桃李)야 꽃인 양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2)'아깝다(=안타깝다) 저 난초(蘭草)야 잡풀(=잡초) 속에 섞였구나/ 섞이기는 섞였다만 본색(本色)조차 변할 소냐/ 아해(兒孩)야 잡풀베다가 난초(蘭草) 벨까 하노라' (1)은 조선전기의 시인 송순(宋純)의 시조이고, (2)는 작자 미상의 조선시대 시조다. (1)의 화자는 국화 앞에서는 아예 '꽃인 척도' 하지 말라면서, 복사꽃과 오얏꽃의 기를 팍 죽인다. 세상에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다. 하지만 (2)의 화자에게는 난초를 제외하곤 모두 다 잡초다. 잡초는 베어버려야 마땅하지만, 그 바람에 난초까지 화를 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몇몇 꽃들만을 인정하는 세상,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끼리만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다른 꽃들이 설 자리가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번 주말에는 산으로 내달려가, 그 동안 우리가 왕따 시켜 왔던 마타리꽃과 쑥부쟁이의 이름을 불러줘야 되겠다. 그들이 나에게로 와서 나의 꽃이 될 수 있도록.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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