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들의 독립운동은 나라 안에서만 펼쳐지지 않았다. 나라가 망한 뒤로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펼치는 데 한계가 많았다.
일제의 직접 통치와 탄압을 따돌리고 피해야 했는 데다 일본군이 주둔해 전국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군사조직을 만들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국외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항일투쟁의 큰 줄기로 나타났다.
3·1운동 이후 일본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1919년 4월 11일 중국에서 임시의정원이 구성되고 경북인 등 대의원 30명이 모여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했다. 이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됐다.
◆임시정부 수립과 경북인
경북 사람들은 1910년대 초반부터 주로 만주지역에 터를 잡고 활동했다. 상해와 북경, 중경 등 중국 관내(만리장성 안쪽) 지역에서 활동하는 인물은 드물었다.
경북 사람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던 무렵과 그 바로 뒤 모습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립 과정과 수립기에 활약한 경북 사람으로는 안동 출신의 김동삼, 김응섭과 남형우(고령), 김창숙(성주), 김정묵(선산), 백남규·현정건(대구), 장건상(칠곡), 손진형(경주) 등이 대표적이다.
건국과 정부 수립을 논의하던 첫 회의에 김동삼이 참석했고, 남형우가 법무총장에 이어 교통총장을, 장건상이 외무차장을 맡았다. 다른 이들도 대부분 임시의정원 의원을 맡아 수립기에 활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좌우세력을 통합한 정부 형태를 띠게 된 뒤로 고려공산당 활동이 본격화됐다. 이 때 활약한 인사로는 장건상, 김응섭, 김단야(김천, 본명 김태연), 윤자영(청송), 현정건 등이 있다. 또 1920년대 북경과 성도에서 아나키스트로 성장한 류림(안동)은 광동·무창봉기에도 참가했다.
수립 직후의 왕성한 활동과 노력에도 임시정부는 점차 침체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청원했던 사실이 알려지자, 그에 대한 반대여론이 들끓고 반대세력이 형성돼 갔다. 반대세력의 주류는 상해를 떠나 북경을 중심으로 터를 잡았다. 그래서 북경은 자연스럽게 '반 임시정부', '반이승만' 세력의 텃밭이 됐다.
◆북경에 자리 잡은 보합단
이 무렵 북경에서는 경북인으로 김창숙, 김정묵, 남형우, 류림 등이 터를 잡았고, 1921년 1월 신채호가 중심이 돼 '천고(天鼓)'를 발간하자 이들은 그 일에 참가했다.
1921년에는 북경에서 '보합단'이 결성되자 여기에도 김창숙이 참가해 자취를 남겼다. 보합단은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인하면서 따로 정부조직체를 세우고자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단장에는 위임통치를 미국에 제안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비난하면서 반 임시정부를 주장한 박용만이 맡았고, 총임장 박용태에 이어 김창숙이 재임장, 신채호가 내임장을 맡았다. 또 1922년 북경에서 군사통일회의가 열리자 김창숙이 간사를 맡아 활동했다.

1920년 12월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혼란을 해결하려고 상해에 도착했지만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이듬해 5월 상해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독립운동계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이에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민대표회 소집을 추진한 것이다.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130명이 넘는 대표들이 참가했는데 의장에 안동 출신 김동삼, 부의장에 안창호와 윤해가 뽑혔다. 여기에 김형식·류신·류시언(안동), 윤자영(청송), 천세헌(문경), 배천택(대구), 김상덕(고령) 등이 대표로 참석해 활약했다.
여기에서도 마땅한 방법을 택하지 못하자 임시정부는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탄핵하고 후임에 박은식을 뽑았고, 헌법을 고쳐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를 채택했다.
수상에 해당하는 첫 국무령으로 뽑힌 인물이 안동의 석주 이상룡이다. 만주 독립운동의 최고 인물을 받아들여 임시정부를 살려 보려는 의도였다.
◆의열단과 상해청년동맹
1920년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에 활동한 중국 내 지역을 대표할 만한 독립운동단체로는 의열단과 상해청년동맹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길림성에서 만들어졌다가 중국 내로 이동했다. 의열단은 1920년 북경과 상해를 거점으로 삼아 국내에 요원을 파견해 일제 침략통치기관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밀양경찰서 투탄, 부산경찰서 투탄, 김시현의 무기반입, 김지섭 의거, 나석주 의거 등 항일투쟁의 빛나는 역사를 펼쳐 나갔다. 거기에 경북 사람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의열단에 참가해 이름을 날린 경북 인물은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은 편이다. 창단 단원 13명 가운데서도 경북 인물은 이종암(대구), 권준(상주), 서상락(달성 성북), 신철휴(고령) 등 4명이나 됐다.
뒤를 이어 맹렬한 활약을 보여준 인물로는 이수택(칠곡), 김시현·김정현·김지섭(안동), 윤자영·김상덕·배천택·류우국(상주) 등이 대표적이다. 1924년 1월 김지섭이 도쿄에서 펼친 니주바시 투탄의거는 침략의 책임을 일본왕에게 물었던 첫 시도였다. 또 나석주 의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자금을 제공한 김창숙의 기여도도 적지 않다.
김창숙은 1925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 국내로 몰래 들어와 경상북도 유림들을 중심으로 자금을 모아 빠져나간 뒤 제2차 유림단의거를 벌였는데, 그때 모은 자금을 김구와 논의해 나석주로 하여금 의열투쟁을 펼칠 수 있도록 제공했다.
상해청년동맹은 1924년 상해에서 만들어진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 조직이었다. 청송 출신 윤자영이 지휘하고 고령 출신 김상덕이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이것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이 조직에 현정건과 이상도(대구)도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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