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오징어잡이
▶②강고배 제작
③음식문화
④종교와 삶
울릉도 주민에게 오징어는 각별하다. 오징어잡이는 지난 100여년 동안 주민 삶의 원동력이었다.
울릉 주민이 오징어를 본격적으로 잡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울릉도로 들어온 일본인 어민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울릉도 오징어잡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한국인들도 농사를 짓는 것보다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오징어잡이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인 어민 수는 점차 늘었고 일본의 오징어 조업 기술도 이들에게 점차 전파돼 갔다.
이렇게 시작된 오징어잡이는 1970년대 큰 호황을 누리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산업도 오징어잡이와 함께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해왔다.
◆ 떼배와 강고배
울릉도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배는 뗏목 형태의 '떼배'다.
1882년 개척령 이후 진행된 초기 울릉도 이주는 '농업 이민' 성격이 강했다. 이런 이유로 대다수 이주민은 해변이 아닌 산골에 정착해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김경도 독도박물관 학예사는 "아이들이 일본인을 흉내 내 물고기를 잡으면 종아리에 피가 맺히도록 때려 뱃사람 흉내를 내지 못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초기 이주민은 어업에 종사하길 꺼렸다. 이따금 해안가에서 미역이나 다시마, 김 등을 채취했을 뿐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주민들이 미역 등을 채취할 때 사용했던 배가 떼배다. 해방을 즈음해 어업이 보편화하면서부터는 낚시를 이용해 오징어를 잡거나 손꽁치잡이에도 활용했다.
울릉도 떼배는 제주도 떼배보다 작고 단순하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2002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울릉도 떼배는 길이가 3m 내외, 폭은 1m30㎝ 정도로 지름 15㎝ 내외의 통나무 8개 정도를 이어 붙여 만들었다. 제주도 떼배가 뗏목 위에 30~40㎝ 높이로 평상을 닮은 '상자리'라는 구조물을 만들어 노젓기와 어로 활동에 편의를 더했던 반면 울릉도 떼배는 원시적인 뗏목 형태에 가깝다. 일부는 난간을 만들어 채취한 해조류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했다.
주로 울릉도산 오동나무를 재료로 썼다. 나무를 자른 뒤 1달 정도 건조해 사용했다. 서면 학포 해안가에 2~3척의 떼배가 남아 있다.
강고배는 20세기 초 일본인이 이주하면서 울릉도에 들여온 개량 목선이다. 초기 강고배는 2, 3명이 탈 수 있는 소형 선박이었고 별도의 동력장치가 없어 노를 이용해 움직였다. 울릉도 어업인구가 늘고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강고배의 크기도 좀 더 커졌다. 규모가 커지면서 돛을 달게 되었고 보다 멀리 항해할 수 있었다. 선미의 일부분을 개조해 '야키다마'로 불리던 동력장치를 부착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울릉도 어민들은 대부분 강고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에 나갔다. 남포등을 활용해 집어하고 사도라는 장비로 오징어를 잡았다.
사동에 사는 박창규(75) 씨가 당시 이야기를 들려줬다. "강고배는 많이 타도 4명이 다(전부)라. 배를 만들 때 큰 강고배는 4칸을 내는데 대부분 칸마다 한 사람씩 타는 식이지. '수박등'이라고 유리로 똘방하게 감싸져 있는 참외만 한 석유등을 배 위에 매달아 놓고 작업하는데, 말이 불이지 불이 아니라.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도저히 어두버가(어두워서) 안 된다."
◆ 60년대 초 배 목수는 20여 명
박창규 씨는 40년을 배 만드는 목수로 살았다. 울릉군 서면 통구미 마을에서 나고 자란 박 씨가 배 목수의 길을 걷게 된 건 지역적 영향이 컸다.
"한마을에 살던 5촌 2명이 배 목수였고, 이웃집 선후배가 배 목수여서 오며가며 강고배 짓는 걸 봤지. 18살 무렵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데. 밥만 얻어먹고 몇 년 따라댕기며 일했다. 3년쯤 하면 강고 정도는 지을 수 있었는데, 18살 때 시작해 21세 때 처음 강고를 지었어. 23세 살 때까지 열두 세 척쯤 지었을라. 이후엔 기계배(동력선) 지었지 강고는 얼마 안 지었다."
박 씨가 처음 일을 시작했던 1960년대 초반 울릉도엔 배 목수가 20명쯤 됐다. 이 가운데 모든 작업을 지휘할 수 있는 도목수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도목수 중에서도 사동에 사는 하조천 어른, 남양에 사는 정수동 어른이 최고였지. 두 분 모두 60대였을 거야. 이웃 형님이자 내가 일을 배웠던 이름난 도목수 박만수 씨는 하조천 어른 제자로 그의 동생 박태하와 같이 일을 배웠는데 당시 우리가 제일 어렸어. 독립하고선 하 어른 연장을 내가 사 와서 썼지."
박 씨는 그 시기 오징어잡이 상황을 들려줬다. "여기서 사동 등대쯤만 가도(해안선에서 600m 정도 거리) 한 사람이 30축(600마리)은 잡았어. 그 때는 전신만신 고기라. 한 사람이 10축(200마리) 정도 잡으면 '어제 오징어 별로 없더라'라고 얘기했을 정도니까. 지금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지."
오징어 호황은 조선업의 활기로 이어졌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어선 규모도 점차 커졌고 디젤엔진을 장착한 동력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기관실과 선장실을 있는 울릉도의 전통적인 동력 목선으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 육지와는 다른 울릉도 목선
울릉도엔 "박치는 목수는 목수도 아니다"란 말이 있다. '박을 친다'는 건 나무와 나무 사이 틈이 생기는 것을 채우는 작업이다. 울릉도 배 목수는 박을 치지 않았다. 대신 톱을 나무판과 나무판 사이에 넣어 일정하게 켜준 뒤 밀착시킨다. 나무가 물에서 붇는 특성을 이용한 울릉도의 독자적인 방수 기술이다.
배 뒤편 아래쪽이 위로 들어 올려진 것도 울릉도 목선의 특징이다. 육지로 배를 끌어 올리기 쉽도록 고안한 것이다. 1980년 울릉읍 저동에 항만시설이 들어서기 전까지 마땅한 계류시설이 없던 이곳에선 파도가 거친 날이면 배를 보호하기 위해 항상 육지로 끌어올렸다.
배를 짓는 울릉도 도목수에겐 별다른 도면이 없다. 길이가 어느 정도면 폭이 얼마면 적당하고, 폭이 얼마면 높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겠다는 게 각자의 머릿속에 있다. "물에 띄워보고 보완해 연륜이 쌓이면 잘 되는 거라. 그러니 잘 하는 사람한테 배를 지으려고 하는 거고."
1970년대 중반 잠시 울릉도를 떠나 포항의 한 조선소에서 일하던 박 씨는 고향 주민의 등쌀에 못 이겨 1979년 다시 울릉도로 들어왔다. "울릉도 사람들이 찾아와서 배 지어달라고 난리인기라. 그 때는 가을이면 불도 없이 낮에도 오징어를 막 잡아 오고 그랬다. 그러니 니도나도 배를 지었지. 요즘은 배 지으려면 허가가 있어야 하지만 그때는 덮어놓고 배부터 지어놓고 허가 내달라 하던 시절이었으니…."
박 씨는 지금껏 1~5t짜리 배를 주로 지었다. 4t 이상은 2명이서 지었는데 대부분 저동에 사는 최정식 씨와 함께했다. 강고배는 혼자서 12일 정도, 1t 규모는 30일 정도 걸렸다. 4~5t은 2명이서 100일, 6t쯤 되면 120일 정도 걸렸다고 했다.
"지금까지 강고배 20척 정도를 포함해 대략 120척 정도를 지은 듯싶네. 돈벌이는 크게 안 됐다. 건축 목수 돈벌이가 훨씬 낫지. 사람은 처음 한 거 못 내버려. 그러니 평생을 했지. 마지막 배 지은 게 2000년도 봄 막내아들 결혼시키던 해였는데. 지금 집이 있는 사동 이 자리에서 4t짜리를 혼자 지었다."
한때 수많은 목선이 제작됐지만, 현재 울릉도에 남아 있는 목선은 없다. 1980년대 후반을 즈음해 울릉도에도 FRP(유리강화섬유 플라스틱) 어선이 등장하면서 1990년대 후반쯤엔 목선 주문은 거의 사라졌다.
"처음 일을 배웠던 박만수·박태수 씨는 육지 가고 우리 5촌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지금 남아있는 사람은 함께 일을 배웠던 박태하 씨, 저동에 사는 최원식 씨, 건축 목수로 일하는 최정식 씨 등이 전부가 아닐까 싶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