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워 시를 쓰고 난 새벽
말장난일 뿐이라고 모조리 지워 버리고
밤새워 잡은 것 잡았다고 여긴 것
무엇이었던가 절망한다
언어라는 것이 고작
밤새 지었다 허물어 버리는 집 같은 것이라면
밤새 불러 보았던 허명 같은 것이라면
있다고 믿은 말들
평생 해 온 말들 모두 어디 있는가
지어지지 않는 집을 짓고
불러지지 않는 호명 하고 난 새벽
내 몸조차 어디 있는지 허둥거릴 때
한 생애 바칠 거라고 믿었던 시는 어디에 있는가
친구가 전화 걸어 와 슬프다 슬프다 말하고
바람은 나뭇잎 스치는 소리 안고 내 귀 흔들지만
언어는 어디에도 없고
나도 없다
가난한 몸 가난한 목숨 가난한 언어
―시집 '나무는 기다린다' (그루, 2015)
* * ** * *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할진대, 언어-시가 "밤새 지었다 허물어 버리는 집" 같은 것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시를 쓰는 것은 자아를 찾아 밤의 사막을 홀로 걷는 일이다. 막막한 사막에서의 바늘 찾기처럼 지난하고 허무맹랑한 작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암울한 시대에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시인 윤동주가 노래하지 않았던가? 시인은 고독한 산책자, 밤의 파수꾼으로서의 한 생애를 언어-시에 바쳐야 한다.
오늘은 '시(詩)의 날'이다. 11월 1일을 '시의 날'로 정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최남선)가 발표된 '소년'지 창간호의 발간일 1908년 11월 1일에 연유한다. "가난한 몸 가난한 목숨 가난한 언어"라는 나의 솔직한 고백은 시인에게 언어-시는 몸이나 목숨과도 같이 비록 가난하나 소중한 생명적 가치를 지닌 등가물(等價物) 아니겠는가? 시인이여! 시의 가난한 등불 켜 들고 참말, 참나를 찾아 새벽길 나서자.
시인·문학의 집 '다락헌'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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