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10월 22일에 열린 제55회 대종상 시상식이 또 한번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며 놀림거리로 전락했다. 장기간에 걸친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공정한 시상식을 진행하겠다고, 그것도 매년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과는 항상 다를 바 없었다. 사고만 안 터져도 그저 다행이라고 부를만한 수준이다. 권위의식에 찌든 영화계 원로들이 시상식을 장악하고 제 밥 그릇 챙길 생각만 하고 있으니 행사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만무하다. 해마다 대종상을 소재로 한 비난성 글들이 시상식 전후로 우후죽순 쏟아지는데도 주최 측은 정확히 뭐가 잘못돼 욕을 먹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모양새다. 그 말이 맞다. 세상이 대종상을 향해 "잘못했다"고 꾸짖는데 주최 측은 왜, 어떤 이유로 얻어맞는지 모르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최 측이 자신들의 문제점을 인지하면서도 애써 잘못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다. 그러니 더 난감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 문제적 시상식을 이젠 없애야 한다.
◇올해 시상식도 코미디쇼로 전락
매년 마찬가지였지만 올해도 대종상 주최 측은 공정하고 체계적인 시상식을 만들겠다고 공언하며 영화계 전반의 협조를 요청했다. 간단히 줄이면 '이번에는 제대로 할테니 제발 시상식에 좀 참여해달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상식장은 텅텅 비었다. 청룡영화상이나 백상예술대상 등 국내 주요 시상식에 각 부문별 후보들이 대거 참석하는 것과 달리 대종상 시상식에는 수상이 확실한 후보 한 명이라도 모습을 보이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이번에도 그랬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성민과 신인상 수상자 이가섭-김다미만 무대에 올라 직접 소감을 전했다. 이성민과 공동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된 황정민은 이날 현장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된 나문희 역시 불참했다. 여우조연상을 받은 진서연은 데뷔 후 첫 영화 연기 관련 상인데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거 불참은 배우 진영 뿐만이 아니었다. 스태프 진영에서도 당연한 듯 대리수상이 이어졌다. 심지어 대리수상자마저 나오지 않은 경우에는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MC 신현준이 대신 상을 받고 "잘 전해드리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MC가 수차례 시상대에서 대신 상을 받아 챙기는 모습은 대종상에만 특화된 '신기한 볼거리'다.
끊임없는 대리수상 퍼레이드 중 사고까지 터졌다. 이날 시상식의 음악상이 '남한산성'의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돌아갔는데, 인지도 없는 트로트 가수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라 대리수상했다. 본인을 '가수 겸 배우 한사랑'이라고 소개하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현장에는 '남한산성'의 제작사 싸이런픽처스의 김지연 대표가 나와 있었으며, 대리수상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무대에 올라간 가수 한사랑을 보고 당황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TV를 통해 중계됐다. 이후 김지연 대표는 촬영상을 수상한 김지용 촬영감독을 대신해 무대에 올라 음악상 대리수상에 대해 "진행에 차질이 있었던 것 같다"라며 영화제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남한산성'은 물론이고 영화 시상식과 무관한 인물을 수상자 측과 상의도 없이 무대에 올린 대종상 측은 오히려 김지연 대표의 태도를 지적하고 나섰다. 제작사와 연락이 닿지 않아 한국영화음악협회와 한국촬영감독협회의 추천을 받아 대리수상자를 선정했으며 김지연 대표의 태도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한다는 내용이다. 음악상 대리수상자로 무대에 오른 가수 한사랑은 다음날 자신이 논란이 되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누군지 잘 모르며 대종상 간부의 연락을 받고 무대에 올랐다"고 황당한 대답을 내놨다.
지난해 TV조선을 통해 방송된 대종상은 중계 과정에서 현장 스태프들의 막말이 그대로 노출돼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올해 역시 음향 등 방송 기술적 문제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건 총체적인 문제다.
◇국내 최고 권위의 '꼰대 시상식'
지속적으로 매를 맞다보면 맷집이 좋아지고 욕도 자꾸 먹다보면 내성이 생긴다. 운동선수나 자수성가형 기업가라면 이런 상황도 긍정적인 케이스로 활용될 수도 있겠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찾아가는 그런 식의 전개다. 그런데 매와 욕에 내성이 생기고 맷집이 좋아진 상태에서 옳은 길을 찾지 못한다면 이제 문제가 커진다. 눈 감고 귀 닫고 남 탓하며 살아가는, 합리적으로 답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논리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자기 말만 하는 그런 '꼰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포인트가 바로 대종상이 가진 총체적 문제의 시발점이다. 영화계에서 사실상 은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원로들이 시상식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저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만 혈안이 돼 매년 행사를 그르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비난을 받으면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하느라 애쓰고 결국은 문제의 원인은 제거하지 못한다.
분명 대종상은 긴 시간에 걸쳐 국내 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친 시상식이다. 하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이 행사가 어느 순간부터 각종 부정부패의 온상이 됐으며 심지어 불공정한 심사와 졸속 진행으로 매년 비난 받았다.
사실 좀 더 적나라하게 속을 뒤집어보자면 대종상이 영화계 대표 시상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 당시 경쟁할 수 있었던 행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룡영화상은 대종상 이후로 한참이 지나 세상에 나왔고, 백상예술대상이 영화를 아우르며 대종상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외에도 방송 등을 수상 부문에 포함했다는 이유로 '영화 전문'이란 타이틀이 대종상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지원금도 거의 끊어졌지만 출발 단계에서는 정부 주도 시상식이었기 때문에 정권의 눈치를 봐야했고 당연히 영화의 작품성에 대한 공정한 시상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나마 80년대까지는 어영부영 명맥을 유지했지만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대놓고 불공정한 심사를 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대종상에 대한 영화인들의 불신이 심해졌고 2000년대로 접어들 무렵에는 대규모 보이콧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영화인들의 단체행동이 대종상 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영화계 발전에 저해되는 등의 요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건 그동안 대종상을 끌고 온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등 주최 측의 부실운영에 대한 불만 제기 차원에서의 정당한 시위다. 과거 대종상은 수상후보작 선정 범위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미개봉작에 주요 상을 몰아주거나 흥행과 평가 양 면에서 크게 실패한 영화의 주연배우에게 주연상을 주기도 했다.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 이들에게는 상을 주지 않겠다고 공개석상에서 자랑스럽게 떠들고 대종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영화인에게는 눈에 불을 켜고 맞대응하기 바빴다. 대체로 이 경우 대종상 주최 측은 자신들이 영화계 원로라는 이유로 대우받길 원했으며 그래서 후배 잘못을 지적하듯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오래 전부터 대종상은 이 행사를 이끌고 가는 이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수단, 그리고 영화계에서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편으로 사용됐으며 이미 이들의 행태가 드러나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인들이 대종상의 한심한 장난질에 장난 맞춰줄 이유가 없다.
무려 55년에 걸쳐 이어온 대종상의 역사는 사실 그중 절반 이상이 부정부패 및 부실운영 등의 키워드로 설명되는 암흑기다. 주최 측을 사리 분별 능력 갖춘 이들로 갈아치우든지 버티고 있는 이들 때문에 물갈이가 불가능하다면, 이제 대종상의 역사를 여기에서 끝내는 것이 맞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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