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19> 3·1운동 후 면면히 이어진 학생운동

정부는 광주학생운동을 기려 11월 3일을
정부는 광주학생운동을 기려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지정했다. 사진은 제4회 학생의 날 기념행사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우리나라 3대 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그리고 이를 계승해 면면히 이어진 학생독립운동이다.

1927년부터 조금씩 확대되던 학생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번졌다. 이 시위에는 전국 300여 개 학교에서 5만4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해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식민지 교육 체제를 반대하고, 민족 교육을 주창했다.

매년 11월 3일은 정부가 지정한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올해로 제89주년을 맞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올해부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변경되면서 첫 정부 행사로 격상됐기 때문이다.

대구와 경북의 많은 학생은 조국 광복이라는 원대한 목적을 이루고자 비밀결사를 결성, 매우 치밀한 행동강령으로 조직적 항일투쟁을 벌였다. 이 학생들의 활동을 통해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의미를 되돌아 본다.

◆대구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현 경북고등학교의 전신인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항일 투쟁은 집단으로 등교를 거부하는 동맹휴학 형태로 진행됐다.

1926년 3월 처음으로 시행된 동맹휴학은 '조선인은 야만인'이라고 발언한 일본인 교사의 사직을 요구하며 시작됐다. 하지만 주동자로 몰린 15명의 학생이 퇴학을 당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학생들은 비밀결사의 필요성을 느꼈고 체계적으로 학생운동을 준비했다. 1927년 11월 10일 윤장혁, 조은석, 손익기는 같은 학교 동급생인 남산동 백대윤의 집에 모였다. 이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해 독립운동에 매진하려는 목적으로 비밀결사 단체인 '신우동맹(新友同盟)'을 조직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지 노예 교육과 민족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동맹휴학 투쟁을 전개했다. 사진은 1930년대의 학교 전경. 경북고역사관

당수에는 장적우, 책임비서 윤장혁, 중앙집행위원 조은석, 백대륜 등으로 간부진을 구성하고 장종환, 이월봉, 박득룡 등 20여 명의 조직원을 3개 조로 나눠 학습에 매진했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와 추적을 피하고자 혁우동맹, 적우동맹 등으로 명칭을 바꿔가면서 내외부적인 학생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1928년 2월 조직을 해산했다. 그 후 1928년 9월 8일 다시 '우리동맹'으로 재결성했다.

1차 동맹 휴교 실패 이후 2년여 만인 1928년 9월 26일 학생들은 2차 동맹 휴교를 준비했다.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 교육과 민족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며 같은해 10월 15일 대대적인 동맹휴학 투쟁을 단행했다. 이 일로 182명이 무기정학, 18명 퇴학, 105명 검거, 24명이 실형 등의 처분을 받았다.

◆우리말 보급한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일제는 1929년 사범학교 제도를 개편하고 우리나라 학생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해 '황국신민'(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된 백성)으로 만들고자 교사양성기관으로 대구사범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곳에 다니던 학생들은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 등 3개의 비밀결사를 조직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방안에 대해 연구했다.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인 문예부(전신 윤독회)가 발간한 독립문학지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인 문예부(전신 윤독회)가 발간한 독립문학지 '반딧불'. 독립기념관 제공

1940년 11월 23일 결성된 문예부는 민족성이 담긴 역사서나 문예작품을 비밀리에 읽고 토론했으며 '반딧불'이라는 독립문학지를 제작했다.

연구회는 반일운동으로 15명이 퇴학당한 왜관 사건을 계승하는 학생운동을 전개하고자 1941년 1월 23일 8기생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연구회의 활동을 보면 재학 중의 활동과 졸업 후의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재학 중의 활동은 연구 발표회, 천재교육의 준비, 민족의식 고취와 동지 규합 등이었다.

졸업 후의 활동은 의성군 안평국민학교에 부임한 장세파, 충북 영동군 황간 남성국민학교에 부임한 오용수, 함북 나진시 약초국민학교에 부임한 최낙철, 강원도 영월금공립국민학교에 부임한 이태길 등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의 모습. 대구시 제공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의 모습. 대구시 제공

1941년 2월 15일 9기생을 주축으로 결성된 다혁당은 우리글로 된 역사 문화 서적을 읽고 토론회를 개최해 민족의식을 높이고자 했다. 또 군사적 행동을 취할 때를 대비해 군사훈련도 준비했다. 방학을 이용해서는 각자의 고향에 야학을 개설하고 문맹퇴치와 우리글, 우리 문화 보급에 노력했다.

그러나 다혁당은 1941년 여름 충남 홍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8기생 정현이 갖고 있던 '반딧불'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와해됐다. 이 때부터 약 2년 동안 검찰의 조사가 있었고 1943년 2월 8일에 예심이 종결됐다. 1943년 12월의 최종 판결에서는 35명에게 2년 6개부터 최대 5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그 가운데 박제민, 강두안, 박찬웅, 장세파, 서진구 등 5명은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 안동농림학교 학생들 "민족위해 싸우다 죽자"
1933년 4월 개교한 안동농림학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군사교육기관으로 변질됐다. 만주군 출신의 일본군이 학교에 배치돼 군사 교육과 노동을 강요했다. 특히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학도병 지원을 강요했고, 이 때문에 1943년 2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대구80연대로 끌려가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농림학교의 일부 학생은 손명술의 집에 모여 임시정부에서 보내는 방송을 들었다. 방송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권영동, 고제하, 서정인 등은 일본의 군대로 끌려가 죽기보다는 차라리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다 비밀결사단체인 '조선회복연구단'을 조직했다.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의 출옥 기념 사진.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의 출옥 기념 사진.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1943년 10월 결성된 조선회복연구단은 안동농림학교 학생뿐 아니라 안동 지역의 지도층 인사들이 참여했는데 1944년 방학 무렵에는 단원이 51명에 이르렀다.

안동농림학교의 또 다른 비밀결사는 1943년 4월 결성된 명성회(여명회)다. 문예동아리의 성격을 띤 명성회는 면학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했으며 '여명(黎明)'이라는 교양잡지를 발간하고, 역사서·사상서 등을 탐독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명성회는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고자 1944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과 연대를 모색했다.

이 두 단체는 '안동경찰서를 기습 공격하고 무기를 확보해 항쟁을 벌인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에 있는 총으로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대를 기습·점령해 일본인을 제압하고, 나아가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 지역으로 진격한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1945년 2월 초 일본 경찰이 이 계획을 알아내고, 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10일 대대적인 검거 탓에 대부분의 회원이 체포됐다. 안동농림학교 항일결사로 인해 체포된 64명은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손성한은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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