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20> 3·1운동의 후예 아나키스트

일제식민지 통치 시기에 민족주의, 공산주의 진영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줬던 아나키스트들. 보편적으로 '무정부주의자'로 번역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그들의 활동에 비춰 탈권위주의자, 무권위주의자, 자유조합주의자 등으로 지칭하는 것이 맞는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아나키스트의 대표적인 집단은 '의열단'이다. 애초에 아나키즘은 '폭력'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모든 권위와 이념을 벗어나자는 생각에서 출발해 이론적인 평화 학술 활동을 펼쳐왔지만 필요한 경우 투쟁도 불사했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한축을 담당했으며­ 자유를 위한 투쟁과 또 다른 권력을 생산하는 사회운동의 모순에 대한 충실한 견제자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 중심에는 경북인들이 있었다. 독자적인 노선에 따라 활발하게 활동하던 경북 아나키스트들의 발자취를 되짚어 본다.

◆일본에서의 아나키스트 운동
식민지 시기 동안 식민 본국인 일본에서 한인들이 펼친 민족운동은 다양하고도 쉼 없이 이어졌다. 여기에 경북 사람들의 활동은 큰 몫을 차지했다.

2·8 독립선언에 참가한 김상덕(고령)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다양한 투쟁이 펼쳐졌다.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으로는 박열(문경, 본적은 상주)과 가네코 부부의 투쟁이 대표적이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은 5세 때 부친이 상주로 이사하면서 어린 시절을 상주에서 보냈다. 이후 가세가 기울자 학비를 관비로 해결해주는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합격했다.

박열이 살던 생가의 모습.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열이 살던 생가의 모습.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열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가담했고 지하신문을 발행하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3학년 재학 중 사상이 건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박열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 젊은 일본인 교사로부터 고토쿠 슈스이의 대역사건(1911) 이야기를 듣고 무정부주의에 대해서 알게 됐다. 또한 3·1운동 당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해 고문이 가혹하다는 사실을 알고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국내보다 일본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1919년 10월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박열사건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신문 기사 전문.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박열사건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신문 기사 전문.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일본으로 넘어간 박열은 22년간 옥고를 치를 정도로 수형 생활이 일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박열의거라고 불리는 일왕폭살미수 사건 때문이다.

니주바시 투탄의거를 시도한 안동 출신 김지섭.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니주바시 투탄의거를 시도한 안동 출신 김지섭.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당시 박열과 가네코 등은 공모해 일본의 황태자인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져 히로히토와 일본 정부 고관을 암살하고자 했지만 사전에 검거되고 말았다.

박열과 가네코는 일본에서 반천황제 투쟁을 펼쳤으며 일본인들이 신처럼 여기던 존재에 정면으로 맞섰다. 더 나아가서 법정투쟁과 옥중에서도 일본 권력을 비웃는 '옥중결혼식'을 진행할 만큼 이들의 투쟁은 대단했다.

1920년대를 장식한 거사 가운데 김지섭(안동)의 니주바시 투탄의거도 한 몫을 차지했다. 1924년 1월에 펼친 이 의거는 일본왕에게 침략전쟁의 책임을 직접 묻는 첫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박열과 김지섭의거는 서로 다른 운동세력에 의해 계획됐고 운동의 경과도 달랐다.

박열의거는 재일한인의 합법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삼은 의열 투쟁인데, 김지섭의거는 투쟁의 공격 목표를 적도 도쿄, 그것도 일본인들이 신으로 여기던 일본왕으로 삼았다. 또 이 무렵에는 사회주의가 강하게 대두하면서 한인들은 일본 사회주의자와 연대해 반제투쟁을 펼쳤다.

니주바시 투탄의거로 체포돼 재판을 받는 김지섭(왼쪽에서 세 번째)의 당시 모습. 경북독립 운동기념관 제공
니주바시 투탄의거로 체포돼 재판을 받는 김지섭(왼쪽에서 세 번째)의 당시 모습. 경북독립 운동기념관 제공

일본에 거류하던 대다수 한인이 노동자였으니, 노동운동을 통해 반제투쟁의 대열에 참가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편, 1927년 좌우합작의 상징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조헌영(영양)은 도쿄지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아 민족운동의 장을 이어갔다.

◆상해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영양 엄순봉
임시정부가 상해를 빠져나간 뒤, 그곳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의 투쟁이 불꽃처럼 피어났다.

영양군 버스터미널 바로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3의사비의 모습. 영양 3의사비는 영양군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유공자 김도현, 남자현, 엄순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영양군 제공
영양군 버스터미널 바로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3의사비의 모습. 영양 3의사비는 영양군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유공자 김도현, 남자현, 엄순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영양군 제공

그 주역에 경북 인물로 영양 출신인 엄순봉이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는 만주에서 활약하다가 일본의 만주 침공 직후에 북경을 거쳐 상해로 이동했다.

바로 앞서 1930년 4월 상해에서는 류자명이 앞장서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고 다시 6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결합체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있었다.

엄순봉은 자연스럽게 여기에 합류했다. 그는 상해에서 류자명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을 깊게 터득했다.

그가 남화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한 때는 1932년 12월 중순이다. 그리고서 육삼정 의거와 이용로 처단 등 굵직굵직한 거사를 감행했다.

엄순봉은 1935년 3월 다시 친일파 이용로 처단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용로가 부회장을 맡던 상해 조선인거류민회는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관의 지휘 아래 움직이던 일제 앞잡이 조직이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이용로가 반동분자를 규합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정보를 수집해 일제 경찰에 제보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엄순봉이 공판과정에서 진술한 이용로를 처단한 동기를 보면 "일본영사관과 결탁해 상해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거류민회에 가입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독립운동자들의 행동을 영사관에 보고한 때문"이라고 밝혔다.

일제 통치력 확산에 앞장서고 있던 이용로는 독립운동가들의 공격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그래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이 이용로를 처단 대상으로 확정했고 투쟁에서 여러 차례 성과를 올리고 있던 엄순봉이 그 임무를 수행할 주역으로 결정된 것이다.

3월 25일 이회영의 셋째 아들인 이규호의 안내를 받아 엄순봉은 이용로 집을 찾아가서 권총으로 사살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두 사람은 중국 경찰에 붙잡혀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인도됐다.

엄순봉은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8년 4월 9일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당시 사형을 집행한 형리의 말에 따르면, 형장으로 나가는 최후 순간까지 조금도 당황하거나 초조해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마지막으로 "대한만세", "무정부주의만세"를 삼창하고 운명했다고 전해진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