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융희황제(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다. 3·1운동 때와 같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만큼 '제2의 만세 운동'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 두 운동은 배경이나 주체, 이념, 규모 등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적잖다.
3·1운동이 제1차 '인도주의'의 부상으로 세계 개조 분위기가 무르익던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6·10만세운동은 '제국주의적' 지배 질서가 공고해진 상황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추진 주체도 3·1운동이 종교지도자와 자유주의자에 의해 시행됐다면, 6·10 만세운동은 자유주의자와 더불어 사회주의자가 전면에 나서는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6·10만세운동의 전개에서도 경북인들의 활동은 국내외적으로 활발했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 7천여 명의 육군과 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 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이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경북인들은 6·10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일경의 탄압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동료들을 보호했다.
◆순종 승하와 6·10만세운동의 태동
6·10만세운동의 계획은 상해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먼저 추진됐다. 임시상해부는 애초 1926년 5월 1일쯤 대규모의 대중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국내 대중단체의 대표격인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1924년에 창립된 이후 집회금지를 당했다가 1926년에 이르러 집회가 제한적이나마 허용되면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때를 같이 했다.
이들 단체는 간담회 형식 모임이나 대의원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메이데이(노동절)' 기념식 행사를 준비해 갔다. 4월 24일에는 정우회, 전진회, 조선노농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 등의 4개 단체가 합동으로 노동절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개최되는 것이었지만, 임시상해부는 이를 이용해 시위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임시상해부의 김단야(김천)는 중국 안동현과 국내로 파견돼 대중시위 계획을 추진했다.
김단야는 김천 개령에서 만세운동을 이끌다가 태형 90대라는 고통을 당한 뒤,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표회의에 참가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1년 6월의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4월 23일부터 4월 29일까지 신의주에 잠입해 국내 거사를 준비하던 중 김단야는 순종의 승하 소식을 접했고, 애도의 분위기가 전국으로 물결쳐 가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가 순종의 승하로 노동절을 원천 봉쇄함에 따라 5월 1일의 대중시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단야 등은 애초의 대중 시위 계획을 만세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임시상해부는 만세운동에 필요한 자금과 격문의 인쇄를 담당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김단야는 상해로 돌아와 조봉암, 김찬 등과 함께 '복상 통곡하는 민중에 격함'이란 격문을 작성한 뒤 최창식이 경영하는 상해 삼일인쇄소에서 5천장 정도를 인쇄해 서울로 보냈다.
이 격문은 안동에 5월 28일쯤 도착했고, 예정대로 삼성운송점에서 서울로 부쳐졌다. 그러나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의 계획이 발각됐고, 격문은 국내의 인사들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압수되고 말았다.
◆국내 만세운동 추진… 안동 권오설
6·10만세운동은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학생층 등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다른 정치이념을 초월해 깊은 연대 아래 계획·추진됐던 점에서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1운동이 민족독립을 위해 종교이념을 초월했다면, 정치이념을 초월한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중반 통일전선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국내에서 6·10만세운동을 추진한 조선공산당은 1925년 11월 발각돼 큰 타격을 입자 추가적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만세시위를 주도한 만세시위의진과 당 중앙기관을 분리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이러한 주장은 안동 출신 권오설에 의해 발의됐고 추진됐다. 6·10만세운동의 투쟁지도부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3인의 지도위원회에서 추진됐던 것과 같이 권오설의 책임 아래 이지탁, 박민영 등 3인으로 구성했다. 이들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와 간부들이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6·10만세운동의 투쟁지도부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지도부는 세 가지의 투쟁방침을 결정했다. 첫째는 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계, 청년계의 혁명분자를 망라해 '대한독립당'을 조직할 것, 둘째는 대한독립당이 우선 6월 10일을 기해 대 시위운동을 실행할 것, 셋째는 시위운동의 방법으로 장례행렬이 지나는 연도에 시위대를 분산 배치했다가 격고문과 전단을 살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 등이었다.
이에 따라 6·10만세운동의 주체들은 혁명세력의 결집에 힘을 기울여 나갔고, 그 가운데 천도교 구파가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천도교 박래원(밀양)은 권오설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인쇄에 필요한 소형 인쇄기 2대와 용지 20장, 활자, 기타 필수품을 구입했다.
이들이 인쇄에 나선 것은 권오설로부터 격고문과 전단의 원고를 받은 이틀 후인 5월 17일부터로, 31일까지 약 5만장의 격문 인쇄를 무사히 마쳤다. 인쇄가 완료된 격고문은 비밀을 보존하기 위해 석유 상자 등에 나눠 담고 천도교당 안에 있는 손재기의 집에 숨겨 뒀다.
하지만 일제가 중국인 위조지폐범이 일본 오사카에서 서울로 잠입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범인 색출을 위해 서울 도렴동을 수색하던 중 위조지폐와 함께 대학독립당 명의로 된 격고문 1장을 발견했다. 이 문제로 일제는 수사망을 좁히던 중 격고문 상자를 찾아냈다. 이 때문에 박래원 등 천도교 인사 등 130여 명이 체포돼 수난을 겪어야 했다.
6월 7일 검거된 권오설은 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30년 4월 17일 일제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날은 마침 조선공산당 창건 5년이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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