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째 북구에서 주민참여예산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모 씨는 지난 8월 회의에 참석했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공모사업 24건 중 대구시에 올릴 3건이 결정돼 있었던 것. 관계자들은 이미 골라둔 3건의 우선순위만 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우 씨는 "20여명의 주민들이 두달 동안 3차례나 모여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일부 관계자들이 의사 결정을 했다"면서 "주민참여예산이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구시와 구·군들이 운영 중인 주민참여예산이 도입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 위원은 관변단체 회원들로 채워지고, 충분한 예산 관련 교육없이 민원성 사업만 쏟아지고 있어서다. 주민들이 제안한 사업을 검토하고 토론할 시간도, 운영을 책임질 인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생활 민원성 사업이 대부분
주민참여예산제도는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편성과 집행, 평가 등 전 과정에 주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다.
최근 3년 간 대구시와 구·군들이 선정한 주민참여예산사업은 각각 759건과 417건 등 1천176건에 이른다. 사업 건수도 해마다 늘어 2016년 245건에서 올해 542건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문제는 주민참여예산사업 대부분이 일반 예산으로 활용 가능한 생활 민원성 사업이라는 점이다.
올해 대구시의 주민참여예산사업 325건 가운데 폐쇄회로(CCTV) 및 보안등 설치사업(54건)과 도로포장 및 교통관련 시설 설치 사업(64건)이 전체 사업의 36%를 차지했다. 체육시설 보수, 편의시설 설치 등 유사한 항목도 적지 않다.
구·군으로 가면 이런 경향은 더 심해진다. 실제로 남구는 27건 중 14건이 CCTV와 보안등 설치사업이었고, 나머지는 도로 포장 요구였다.
주민참여예산 사업에 대한 관심도 싸늘하다. 구·군의 주민참여예산위원 중 직접 공모에 신청한 주민은 모두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동구와 남구, 달성군 등 3곳은 공모에 신청한 주민위원이 전무했다.
결국 모자란 예산위원은 관변단체 회원이나 통장 등으로 채워졌다. 동구의 경우 위촉직 예산위원 20명이 모두 전·현직 관변단체 임원이나 주민자치위원회 관계자였고, 서구와 남구도 각 동에서 추천한 예산위원들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대구시 한 주민센터 관계자는"공모를 거쳐 주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담아야하지만 호응이 없으면 익숙한 관변단체를 통해 섭외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주민참여예산제도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특히 올해 지역 실정에 맞게 교육 내용을 자체 기획한 기초단체는 중구와 북구뿐이었다. 나머지 구·군은 대구시가 제공하는 '찾아가는 예산학교' 교육에 한두 차례 참석하는데 그쳤다.
다른 한 구청 관계자는"주민참여예산위원회의 연간 운영비가 520만원으로 책정돼 있어 자체 교육을 위한 강사 섭외 등이 어렵다"고 했다.
◆사업 검토 시간 태부족
"투표하기 전에 질의를 해야지 투표 끝나고 나서 질의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난달 대구시 한 구청에서 열린 주민참여예산위원회. 35명의 위원들이 둘러앉아 내년도 예산 6억원을 배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의는 시작부터 삐걱댔다. 한 위원이 심사에 앞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시간이 촉박하니 투표 종료 후에 질의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날 위원들이 2시간 동안 심의해야하는 사업만 103개나 됐기 때문이었다. 사업 설명은 1분을 넘기기 어려웠고, 질문이나 토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주민참여예산사업의 결정 과정 자체가 부실하다보니 보여주기식 사업도 적지 않게 반영된다.
2016년 서구청의 사업 공모에 제출된 주민참여예산 사업 9건 가운데 2건은 주민들이 제안하지 않은 사업이었다. 한 건은 주민 민원이 주민참여예산 사업으로 둔갑했고, 다른 한 건은 구청이 과거에 제출된 사업을 그 해에 제출된 것처럼 처리했다.
다른 구청은 2016년 사업을 제안한 주민이 활동하는 기관과 수의계약을 맺고 해당 사업을 진행해 논란이 됐다.
◆운영예산 및 인력 확대해야
대구시 주민참여예산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이형배 마을문화공작소 '와글' 대표는 "주민참여예산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주민들이 단기간에 내놓은 사업은 생활 민원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며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충분히 참여할 수 있도록 모집기간을 늘리고 예산위원들이 교육받고 검토할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주민참여예산이 안착하려면 전담조직 확충도 절실하다. 대구시에는 직원 3명이 주민참여예산 업무를 담당하지만 구·군에선 예산담당부서의 주무관 한 명이 겸임하고 있어 내실 있는 운영이 어렵다는 것이다. 회의시간을 늘리거나 구·군별 교육을 하려고 해도 현재의 운영비와 인력으로는 쉽지 않다.
이에 따라 대구시는 조만간 주민참여예산제도를 평가한 뒤 지난 4년 간의 주민참여예산을 돌아보는 백서를 발간할 계획이다.
대구시 관계자는 "주민참여예산위원과 공무원, 시민단체 등이 모여 그동안의 결과를 살피고 개선사항을 발굴해 내년 운영에 반영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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