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례의 추억/권상진 지음/학이사 펴냄

지례의 추억 표지
지례의 추억 표지

팔순을 바라보는 지은이(1940년생)가 고교 1학년 시절 스치듯 만나고 헤어진 여학생을 그리워하며 쓴 산문집이다. 열일곱 붉은 얼굴의 소년이 주름 깊은 팔순의 노인이 되기까지 한세상을 살아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스치듯 만나고 헤어진,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한 여학생과 추억을 떠올리며 결코 돌아가 악수할 수 없는 세월을 되새긴다.

61년 전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지은이는 여름방학을 맞아 같은 반 친구의 집이 있는 김천시 지례면 산골마을(고렴마을)을 찾아간다. 기차 안에서 역시 김천시 지례면의 고모집으로 가던 여고생을 만난다. 기차에서 지은이 권상진 군이 베푼 짧은 도움을 인연으로 여고생은 지례가 초행인 지은이를 배려해 들길과 산길을 함께 걷고, 시냇물을 건너 친구의 집까지 동행한다.

친구 집에서 며칠을 머문 지은이가 대구로 돌아왔을 때, 먼저 돌아와 있던 여고생은 대구역으로 마중을 나온다. 역 대합실 모퉁이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여학생을 발견했을 때 지은이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두 사람은 대구역에서 여고생의 집이 있던 반월당까지 함께 걸었다. 하지만 너무도 어렸던 아이들은 집 근처에 당도하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헤어졌다.

"손 한번 잡아본 일도, 어설픈 고백이나 약속을 한 적도 없었지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61년이 지나 지은이는 여학생과 함께 걸어갔던 먼 길을 되짚으며 김천시 지례면 고렴마을을 찾아간다. 대궐 같았던 친구네 기와집은 풀 넝쿨에 덮였고, 웅장하고 당당하던 문짝은 문설주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정했던 친구는 세상을 떠났고, 금방이라도 산짐승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여학생과 서로 의지하며 걸었던 길은 매끈하게 포장이 돼 있었다. 세상은 부지런한 세월을 따라 멀리 가버렸는데, 그만 홀로 옛 자리에 돌아와 외롭게 서 있었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 아무 데나 함부로 퍼질러 앉아 쉬거나 곁눈질 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 했고, 쓸모 있는 사회인, 존경받는 아버지와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그 여학생과 함께 산길을 걸었던 시절은 내 생에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시절이 그처럼 아름답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갈래머리 여고생과 다리를 둥둥 걷고 함께 건넜던 지례의 냇가를 61년이 지나 다시 찾은 지은이는 "하얀 얼굴에 갈래머리가 귀여웠던 소녀, 초행인 나를 걱정해 험한 산길과 고개를 함께 넘어주었던 사람…. 열일곱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팔순으로 건너온 것 같다. 나는 어째서 긴 세월을 다 흘려보내고 이제야 왔는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 산문집에는 고교 시절 여학생과의 사연을 담은 '지례의 추억'을 비롯해, 지은이가 세상을 살면서 조우하고 멀어졌던 삶과 인연에 대한 수필 10여 편이 실려 있다. 오랜 세월 고지식한 남편 곁을 지키며, 평화롭고 안정된 가정을 꾸려준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 3편도 함께 묶고 있다. 한편 한편이 모두 은유가 넘치는 작품들이다.

지은이 권상진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불우청소년 선도 및 후원단체인 한국BBS 대구연맹회장을 오래 역임했다. 2017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책 판매 수익은 모두 BBS에 후원한다. 192쪽, 1만2천원.

지은이 권상진씨가 60여년 전 갈래머리 여고생과 함께 건넜던 김천시 지례면 냇가를 다시 찾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다.
지은이 권상진씨가 60여년 전 갈래머리 여고생과 함께 건넜던 김천시 지례면 냇가를 다시 찾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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