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이후 몇 년 동안 대구 시내에서는 "중앙, 중앙 거지 떼들아! 깡통의 옆에 차고 부잣집으로 달려라, 달려라 부자 집으로."라는 미국 가요응원가 곡에다 가사를 붙인 노래가 유행하여 많은 대구 시내 국민 학교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특히 대구국민학교나 수창국민학교 남자 아이들은 중앙국민학교 교문 앞에 와서 이 노래를 대놓고 합창했다. 싸움을 걸기 위한 전주곡으로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그 시절 중앙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 아이들을 왜 '거지 떼'라고 불렀을까? 대구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도 모르고 문헌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답을 찾을 수가 없다. 한동안 잊혀 가던 이 노래가 다시 기억에 떠 오른 건 얼마 전 서양 교향악단의 연주 중에 '중앙 거지 떼'의 전곡이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행진곡 형태로 신나게 연주되었다. 그 시절 이런 고급 음악에 왜 이상한 가사를 붙여 노래를 했을까?
공평동 중앙국민학교 담 너머에 법원과 검찰청이 있었다. 형무소, 육군본부, 도지사 관사, 경찰국장 관사, 시청이 부근에 있었다. 학교의 서쪽에는 동성로 가게골목과 양키시장이 있었다. 동인동, 공평동, 주택가에는 양키시장, 동성로에서 금은방, 카메라 상회, 전자 상회를 경영하는 부자들이 살았다.
중앙학교는 고급공무원과 부잣집 아이들과 피난 온 가난한 집 아이들이 같이 학교에 다녔다. 빈부의 차이가 이렇게 심한 학교는 없었다. 피난민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오면서 중앙국민학교는 학교 건물은 전처럼 그대로 있어도 알맹이는 팔도조선 축소판 학교로 변질되었다. 여태 보지 못한 아이들의 돈벌이가 시작되었다. 북쪽에서 내려 온 아이들은 주로 신문배달이나 신문팔이를 했다. 구두닦이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극장 포스터 붙이기, 미군들의 사택에서 '하스 뽀이(하우스 보이)'도 했다. 밥 굶고 돈벌이를 하는 초라한 아이들을 보면 분별없는 아이들 눈에는 거지로 보였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민 학교가 없어지며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이들은 중앙국민학교에 편입되어 대구 사람이 되었다. 전쟁 중에는 공평동 학교가 미군에게 징발되고 경북의대 부속병원 앞에 있는 공터에 판잣집(나중에 동덕국민학교가 됨.)을 지어 놓고 저학년은 거기서 공부를 하고 고학년은 신천에서 노천 수업을 하였으니 이들이 거지가 아니겠는가!
고급공무원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심 그리고 피난민이 주축 되어 거지와 다름없이 겨우 먹고 사는 빈민촌 아이들에 대한 측은지심과 경멸의 감정이 거지 떼라는 단어로 분출되었다고 생각이 된다. 이 노래를 부르던 축들은 어는 덧 노인들이 되었다.
'중앙, 중앙 거지 떼' 노래가 어린 시절 들어도 무감동이고 지금 들어도 화가 나지 않는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자신이 거지가 아니었으니 감정이 생기지 않고 못사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거지와 다름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별 화날 것도 없었다.
당시의 거지는 요즘은 거지와 달리 야비하거나 추악하지 않았다. 거지라는 말은 다만 하나의 존재에 대한 명칭이지 멸시의 대상은 아니었으므로 노래 또한 기분상할 일이 되지 못했다. 미스 코리아 손미희자, 가요왕 손시향, 남일해 그리고 야구의 신 이만수와 이승엽등이 거지 떼의 후손들이다. 언제 선후배 모두 모여 '중앙 중앙 거지 떼'들아 크게 합창 한 번했으면 좋겠다.
전 대구적십자병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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