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던 무렵의 로마는 제정 시대로 접어들면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동안 로마는 세계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거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유럽 문명의 기초를 놓아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달러화는 로마 제국의 금화 솔리두스의 제일 앞 자를 따서 S로 쓰고, 영국의 파운드화는 로마 제국의 무게 단위 리브라의 첫 글자 L로 표시한다. 로마의 달력, 로마의 법률과 행정체계들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로마가 처음부터 압도적인 국력으로 이웃나라들을 제압했던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찬란한 문화적 업적들은 그리스에서 건너온 페다고기들(교육을 담당한 노예들)을 빼고는 성립할 수 없었으며, 로마인들은 그리스풍의 문예가 이룩한 높은 성취를 동경했다. 서양의학의 천년을 지배한 거성 갈레노스만 해도 로마에서 활약한 그리스 출신 지식인 중의 하나다. 오죽하면 로마의 대시인 호라티우스가 "정복된 그리스가 자신의 정복자 로마를 정복했다"고 감탄했겠는가.
그런데 로마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높은 수준의 문명을 자랑하던 그리스를 제압하고 헬레니즘 세계의 막을 내리게 되었을까. 여러 가설 중의 하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분제에서 답을 찾는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철저한 순혈주의와 그에 결합된 위계구조를 통해서 계층 간 이동을 막고 엘리트 위주의 사회를 유지한데 반해서, 로마는 타 민족과 문화를 로마의 이름하에 포섭하는데 열려 있었다. 특히 로마의 노예는 10년간의 의무 노동을 마치고 나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는데, 바로 여기서 로마와 그리스의 운명이 갈렸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니까 로마의 노예는 비록 천한 신분일망정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이는 노예의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을 수 있다는 강력한 희망으로 작용해서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과 직업적 성실성을 낳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록 고생을 하지만 내 자식에게는 새로운 삶을 줄 수 있다는 희망이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로 이어진 경우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있다는 희망, 내가 수고하고 애쓴 만큼 내 자식들은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는 희망은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그리고 이 희망은 고대 로마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놀라운 경제적 성공을 견인한 동기가 되었다. 교육에 관한 우리 사회의 담론이 입시의 공정성에 집중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금수저건 흙수저건 간에 공부 하나라도 잘하면 입신양명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그러니까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어떻게든 유지하고픈 욕구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욕구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예전 학력고사 시절처럼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줄을 세우자는 의견은 시대의 변화를 외면한 퇴행일 뿐이다. 이미 이전 시대의 입시 위주 교육이 어떤 폐해를 낳는지는 거개가 익히 알고 있다. 고도 성장기가 끝나고 선진국형 저성장 시대를 맞아들이는 시점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다음 세대가 '나보다 더 많이 벌게 하는', '나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아닐 것이다. 소유의 크기에 관계없이 다음 세대가 '나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근본이 무엇일지 묻는 것, 삶의 의미에 대해서 묻는 것이 올바른 질문법이 아닐까.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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