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임벌린의 시간'(Chamberlain's moment)이란 말이 있다. 히틀러의 위장 평화공세에 속아 나치에게 시간을 벌어줬던 영국 총리 체임벌린의 어리석음을 빗대 나온 말이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통일'을 외치는 한편으로 올리브 가지를 흔들고 다녔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을 상대할 힘이 없다 보니 평화를 위장한 것이다. "민족 사회주의(나치) 독일은 평화를 필요로 하며 또 원한다"고 입에 달고 다녔다. '폴란드와 맺은 불가침 협정을 지키겠다' '오스트리아를 합방할 의도가 없다'고 했다.
체임벌린이 걸려들었다. 히틀러를 몇 번 만나더니 "냉혹하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믿을 수 있는 사나이"라고 했다. 인물 됨됨이를 제대로 간파할 능력이 그에겐 없었다. 대신 그는 '평화'라는 수사에 매달렸다. 국민을 향해 "어떤 사정이 있어도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끌어넣을 수는 없다. 나는 영혼 깊숙한 곳까지 평화 애호가"라고 호소했다. 국민 역시 전쟁보다는 평화라는 말에 더 솔깃했다. 그는 히틀러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던 프랑스를 설득하기 위해 영불해협을 넘나들기도 했다. 그 결과 히틀러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뮌헨협정이 체결됐다. 이번엔 '우리 시대의 평화가 왔다'고 흥분했다. '총리의 협상 결과는 전면적 절대적 패배'라는 처칠의 경고는 '평화'란 수사에 묻혔다.
그로부터 2년도 안 돼 나치의 비행기가 런던 하늘을 뒤덮었다. 런던 대공습이었다. 영국인 4만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화라는 말에 솔깃해하던 국민들은 때늦은 후회를 했다. 체임벌린은 실각했다. 영국은 이미 혹독한 피해를 입은 후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진작 좀 더 강하게 대응했더라면 2차대전에 앞서 히틀러 정권이 먼저 무너졌을 것이란 주장이 나온다. 지금 체임벌린은 영국 역사상 가장 무능했던 총리로 남아 있다.
요즘 김정은을 두고 오가는 수사가 당시 히틀러를 두고 영국에서 오간 말들을 곱씹게 한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통일'을 내세웠다면 김정은은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한다.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면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켰다. 평화 시대를 열자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는 모습은 세계 최초 미사일 개발에 열중하던 모습과 닮았다.
김정은을 몇 차례 만난 후 '아주 예의 바르고 솔직 담백하더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가는 체임벌린의 히틀러에 대한 평가를 떠오르게 한다. '국민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평화가 일상화됐다'는 청와대의 변은 '우리 시대의 평화가 왔다'고 흥분하던 모습에 다름 아니다. 북에 대한 제재의 고삐를 조금만 더 죄었더라면 북이 비핵화를 먼저 제안했을 것이란 역사적 가정도 흡사하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안보에 가정은 필수다. 그것도 최악의 시나리오에서의 가정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를 너무도 허투루 여긴다. 북방한계선(NLL)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말로 이룬 평화에 우리 군의 무장해제 속도는 가파르다. 반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요지부동이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김정은 답방에 목을 매고 있다.
문 대통령의 판단이 옳기를 기대한다. 청와대 말처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서라거나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결과가 너무 끔찍할 것 같아서다. 문 대통령이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남지 않기를 학수고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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