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
약자 돕는 정치 실종돼 사고 되풀이
노인·교육·육아 문제 파고드는 의원
뽑을 수 있는 선거법 개정 합의 '위안'
중국 한나라의 역사가 반고(班固)는 '정재억강부약'(政在抑强扶弱), 즉 정치의 의미는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 데 있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새벽에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꽃다운 청년 김용균 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생각난 말이다. 가진 것이 없다고 성실하게 일하는 청춘이 이렇게 쓰러져간다면 대한민국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날로 심해지는 것이 과연 정상일까.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정치의 실종을 절감한다. 정치 때문에 사고가 터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고는 2년 전에 있었던 서울 구의역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 사건과 판박이다. '위험의 외주화'가 초래한 결과이다. 당시 이 문제에 대해 정치권은 너도나도 해결하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결과는 없고 똑같은 사고는 되풀이되었다. 약자를 돕는 정치가 죽었기 때문이다.
원래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은 강자에 대한 견제의 원리를 담고 있다. 권력자를 법으로 묶어놓기 위해 만든 것이 헌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헌법만으로 강자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보호가 쉽지 않다. 권력은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집중된다는 '과두지배의 철칙'을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미헬스(Robert Michels)가 주장한 이후 이 기분 나쁜 이론을 아무도 논박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 권력이 반드시 부패하듯 집중된 힘은 세상의 해악이 된다. 이 때문에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정치고, 그로써 약자를 돕는 것이 정치의 본분이다.
물론 권력을 집중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도 있다. 국난의 상황이나 가진 게 없을 때는 탈탈 털어서 힘을 모아야만 한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집중 자체가 걸림돌이 되고 독재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만다.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서는 힘 모아 키워준 재벌이 국민경제에 아무런 낙수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강한 대통령과 힘 있는 여당이 국정 농단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강자들은 여전히 힘을 몰아달라고 주장한다. 힘을 몰아준다고 정치가 살아나지 않는다. 힘 있는 김영삼 대통령은 공안 정국을 주도했고, 다수를 확보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오만한 정권으로 몰고 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번 예산안 처리에서 드러났듯이 힘이 없어 협치를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예산안 통과를 정치 행위라고 강변하지 말자. 도적들도 협력해서 약탈한 물건을 잘 나눠 갖는다. 약자들에게 돌아갈 복지 예산을 떼어 지역구 개발 예산으로 나눈 것을 보면 기가 막힐 따름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Jűrgen Habermas)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특히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와 달리 공동체 정신이 약화되어 개인이 고립된 상태에서 국가마저 약자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들은 곧바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국가의 해체로 이어진다. 주변부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전 사회까지 붕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지난 주말에 정치권이 선거법 개정에 합의해서 약자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도 이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에 헌신하는 국회의원, 농업에 정통한 국회의원, 노인·육아·교육 문제를 끝까지 파고드는 국회의원을 비례대표로 뽑을 때도 되었다. 이것을 아까워하다가 훗날 내가 약자가 되어 피눈물을 흘려본들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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