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가 고장 났다. 엄동설한에 보일러가 고장 나다니 이렇게 난감한 일이 없다. 집 안에는 냉기가 감돌고 수도꼭지에는 찌릿한 찬물이 흘러나왔다. 열두 살이 된 낡은 보일러는 팔순 노인처럼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부랴부랴 수리를 문의했다. 이것저것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는 데에만 수십만원이 든단다. 이참에 새 보일러로 교체하기로 했다.
보일러는 기깃값도 비싸지만 설치비도 만만치 않다. 반드시 보일러 관련 면허를 소지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가스보일러 설치는 반드시 고압가스 자격증과 온수 온돌 자격증 등 관련 자격증을 갖추고, 가스안전공사의 안전교육을 받은 뒤 지방자치단체의 가스시설시공업 허가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한다.
보일러를 설치하러 온 설비업체 대표는 강릉 펜션 참사 얘기를 꺼냈다. 10대 청소년 3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의 원인으로 보일러 본체와 배기관 사이로 누출된 배기가스가 지목됐기 때문이다. 업체 대표는 "평소보다 신경이 쓰인다"며 배기관 사이의 연결 부위를 바짝 조이고 실리콘으로 꼼꼼하게 마감했다. 가스 배관에는 비눗방울을 발라 가스 누출 여부도 확인했다. 설치가 끝난 보일러 본체에는 시공자와 시공자 등록번호, 시공관리자 이름 등을 적어 단단하게 붙였다.
그는 "강릉 펜션에 설치된 보일러는 분명 무자격 업체나 건축주가 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업체 대표의 확신은 단 하루 만에 사실로 확인됐다. 강릉 펜션에 보일러를 설치한 업체는 가스통 판매 자격만 있고, 가스시설시공업에 등록하지 않은 무자격 업체였다. 십수만원을 아끼려 전문 지식도 없는 업체에 시공을 맡긴 게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는 끔찍한 결과로 나타난 셈이다.
배기관과 보일러 본체가 어긋나 있던 것 외에도 무자격 업체의 시공 자체가 잘못됐다는 의견도 있다. 강제급배기 방식의 보일러 연통은 끝에 배기구가 있고 주름관으로 된 급기관이 있다. 급기관은 반드시 메인 급배기연통의 위쪽으로 연결돼야 한다. 급기관이 아래로 처지거나 구부러져서도 안 된다. 연통을 통해 결로나 들이친 빗물이 급기관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진상에서 본 강릉 펜션의 보일러는 급기관이 약간 옆으로 연결돼 있고, 급기관이 아래로 처져 있다. 급기 통로를 통해 보일러 내부로 물기가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거나 매뉴얼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무자격 업체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설치한 셈이다.
문제는 위험하게 설치된 보일러가 대구에 얼마나 있을지 파악조차 어렵다는 점이다. 보일러를 시공해준 업체 대표는 "노후된 단독주택에 설치된 LPG 보일러는 인테리어 업체나 무자격 설비 업체가 보일러를 달아주는 경우가 많다"고 걱정했다. LPG를 연료로 쓰는 대구의 단독주택은 7만2천 가구나 된다.
사고가 터지면 누구나 규정 미비를 내세운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규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비용을 아끼려는 건축주의 안일한 인식과 연통을 잘못 연결한 무자격 설치업자의 책임이 가장 크다. 일산화탄소 경보기나 안전 규정 강화는 부차적인 문제다.
안전은 누군가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사고 예방의 가장 큰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집에 설치된 보일러 연통을 한두 번 쓱 살펴보기만 해도 끔찍한 사고는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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