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우리들의 겨울 양말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발바닥엔, 먼 능선을 타고 온 한기가 잔뜩 서려 있습니다. 겨우내 살얼음판 같은 세상 오가며 예쁜 발 얼지 말라고 준비해준 양말은 어디에 두고, 맨발이 발갛게 얼었습니다. 시린 발 내 두 손으로 꼭꼭 만져가며 작고 보드라운 발을 녹입니다.

깜깜한 밤, 남편도 큰아이도 집으로 돌아옵니다. 땀이 밴 귀갓길, 온종일 긴장하며 뛰어다닌 발바닥이 좋지 않은 냄새를 풍깁니다. 바깥 냄새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게 미안했던지 현관에서 습관처럼 양말부터 벗습니다. 빨래 바구니엔 양말이 수북합니다. 늘어지고 낡은 양말, 종일 찬 기운이 얼마나 스며들었을까요. 말굽처럼 단단해진 발바닥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은 또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대신동 양말 골목을 지나며 오래된 상회 앞에서 걸음을 멈췄던 적이 있습니다. 겨울 양말을 고르며 값이 참 헐하다 생각했습니다. 세월에 무뎌진 발을 얼마나 오랫동안 안아줄지 모르겠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박음질이 참 탄탄한 게, 올겨울은 거뜬히 보내겠다 싶었습니다.

지난여름, 어느 골목을 지나다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단독주택 지하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드르르르 드르르르' 재봉틀 소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또 다른 주택에서는 '웅웅웅' 이름을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실 꾸러미 수십 개를 달고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골목 그늘진 곳에는 노인 두어 분이 커다란 돗자리를 깔고 양말 실밥 따기를 하고 있었지요. 도심에서 아직도 가내수공업을 하는 집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값싼 중국산에 밀릴 법도 한데 몇 푼 더 줘도 제값 거뜬히 하니까 'MADE IN KOREA'가 최고라지요.

비록 무디고 더딘 걸음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내일을 향해 꾸역꾸역 걸어갈 우리들의 발에 성탄절인 오늘만큼은 새 양말 한 켤레씩 선물해도 좋겠습니다. 오늘 일과가 끝날 무렵 내 발 또한 땀에 절어 세상의 온갖 냄새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겠죠. 양말 골목을 지나다 내친김에 두어 뭉치 더 준비합니다. 평소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던 지인들이 생각나네요. 이 차가운 겨울에 도톰한 겨울 양말 한 켤레 선물 받는다면 어떨까요?

겨울은 더 깊어질 테고, 내일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갈 당신의 발에 나는 성탄의 아침을 맞아 따뜻한 겨울 양말 한 켤레로 감사를 대신합니다. 이 한 켤레의 양말이 오래도록 당신의 발을 따뜻하게 위로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올 한 해 먼 길 걸어오신 당신, 수고하셨습니다. 우리의 내일 또한 참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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