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이듬해 10월 1일 대구에서 '남조선 노동당' 주도로 무장 공산폭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폭동은 동서남북 다른 도시로도 확산되어 공산폭도들이 공무원과 부자들을 총을 쏴서 혹은 얼굴 껍질을 벗기거나 몽둥이로 때려 무참하게 죽였다.
4년 뒤 '북조선 노동당'들의 본격적 남침이 시작되었다. 1960년 2월 28일 반독재 대구학생운동이 방아쇠가 되어 고려대학교 4.18. 그리고 하루 뒤 전국 대학생들의 4.19학생 혁명이 일어났다.
대구경북은 시대를 앞장서는 진보적인 도시였다. 일제시대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쪽 양반들 중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새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에 의지한 사람들이 많았다. 경주 내남 사람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시한 동학이 전라도에서 꽃을 피운다. 대구경북이 이런 혁신적 도시인 줄도 모르고 수구 꼴통의 도시라고 이름 짓는 무식한 사람들이 있다. 이승만 정권 때는 대구 국회의원 전부가 야당인 민주당 출신이었고 전라도 사람 조재천이 경북도지사를 하다가 나중에 남구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유신 18년 동안 대구경북인들이 수구의 보신과 우물 안 개구리적인 사상을 타파하여 이룩한 개혁적 업적을 단순하게 독재에 부역한 것으로 치부하는 무지한 인간들도 많다.
조선의 거대한 인물 서거정(호 사가정)선생은 대구 사람이다. 어릴 때 서울로 갔지만 고향의 잊지 못해 '대구 10경'이란 시를 남긴다. 서울 면목동에 사가정 공원이 있다. 사가정로가 있고 사가정역도 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사가정 선생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빙허 현진건 선생은 계산동에서 태어나 살다가 서울에 갔다.
대구는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전라도 전주 대사습의 예선을 거쳐 대구 감영에 온 판소리꾼들이 본선의 심사를 받았다. 이곳에서 합격이 되어야 정식 가수가 되어 서울 무대로 진출할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판소리는 전라도 전유물이요. 색향 하면 진주, 평양, 강경이라고 한다. 대구가 권번이 두 군데나 있었던 그야말로 당시 아이돌의 고장임을 모른다.
음악의 도시 대구 출신 유행가 가수만 소개해본다. 대구 최초의 유행가 가수는 1930년대 활약한 장옥조다. 39년 백년설, 42년 나화랑, 46년 강남달, 47년 고화성, 신세영, 53년 방운아, 56년 도미, 58년 남일해, 손시향이 초기 가수들이다.
후기 가수들은 1964년 생 김광석부터다. 65년 장호일, 70년 배금성, 서진필, 71년 이지연, 72년 이한철, 79년 양파, 79년 박규리, 83년 김미, 86년 민효린, 베이식, 87년 이센스, 88년 Jun. K , 91년 Key C, 샤이니, 레이즈, 92년에 가은, 이승현, 94년에 이승현, 94년 동호, 95에스쿨스, 98년에 송유빈, 2000년에 예나, 2018년 방탄소년의 슈가(민윤기), 뷔(김태형)가 활약 중이다.
운동장에서 조회를 기다리며, 동네서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치자 물들인 교실 나무 바닥에 초칠을 하여 광을 낼 때, 창문에 걸터앉아 유리창을 닦을 때 대구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불리던 노래를 함께 부르며 일 년 동안 연재되었던 대구음악유사의 대미를 장식해본다.
"팔공산 줄기마다 힘이 맺히고/ 낙동강 굽이 돌아 보담아 주는/ 질펀한 백리 벌은 이름난 복지/ 그 복판 터를 열어 이룩한 도읍/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들어라 드높으게 희망의 불꽃." -대구시 제정, 백기만 작사, 유재덕 작곡.(1955년 12월 20 채택)- 대구시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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