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영부영 많은 시간이 지났다. 앞마당 채마밭엔 뭐가 자라고 있었는지, 뒤꼍 앵두나무 옆에는 김장독이 몇 개나 묻혀 있었는지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마루 밑에는 감 따는 장대(전짓대) 말고 또 뭐를 쟁여두었는지도 역시 세월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다만 그 겹겹의 시간에도 한 가지, 반질반질 윤기 나던 툇마루만큼은 여전히 또렷하다. 하루 한 번씩 꼬박꼬박 햇살이 찾아와 쉬고 가던 그곳은 네댓 살 남자아이에겐 무척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른들이 없을 때, 거기에선 요새가 생겨나고 진지도 만들어졌다. 섬돌 위 난간 따라 곧게 뻗은 찻길도 있었는데 트럭이 아슬아슬 잘도 달렸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마당 건너 신문지 조각 하나가 바람을 타고 툇마루로 날아들었다. 그걸 주워든 아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엄마를 찾았다. "엄마 이것도 글자가? 네모 안에 네모가 있다." "아 이거 한문이다. 돌아올 회자다." "돌아올 회?, 뱅글뱅글 돌 거면 동그라미를 하지 와 네모를 하노?"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툇마루로 돌아오다 생각을 했다. "우리 엄마는 참 모르는 게 없다니까!"
그게 아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물음이었다. 그리고 '回'(회)자는 태어나 알게 된 첫 번째 한자였다. 그 후로도 아이는 궁금한 게 생길 때면 엄마를 찾았고 그때마다 답을 얻었다. 그런데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난 엄마가 낳고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낳고 그렇게 계속 올라가면 시작은 누구며 그 사람은 또 누가 낳았느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엄마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다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물어보라고 했다. 아이의 마음 가득 섭섭함이 일었다. 엄마가 모를 리 없는데 알면서도 안 가르쳐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생님께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곧 잊었다. 어차피 학교에 가면 알아야 할 것들과 외워야 할 것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엄마에게 묻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가끔 옛날이야기, 정확히는 옛날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몇 백 년 전의 조선 사람부터 더 멀리 삼국시대의 사람들까지, 그리고 가깝게는 조봉암과 해공 신익희를 들었고 시인 한하운도 이야기로 들었다. 그런데 이야기들이 재미있긴 했어도 궁금한 게 단박에 풀렸을 때처럼 그런 알싸한 맛은 없었다. 게다가 엄마의 이야기는 크게 실익이 없었다. 그런 건 학교 숙제에도 시험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때, 세상이 참 조용했다. 매미가 잠시 울음을 멈추면 적막한 여름소리가 들렸다. 겨울에도 눈 내리는 날이면 이불 속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도 늘 그대로였다. 길가의 풀꽃도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피었고 돌담 사이 구멍도 더 커지거나 줄지 않았다. 틀림없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 몰랐던 거다.
엄마는 영원할 줄 알았다. 더는 물을 수 없는 날이, 더는 들을 수 없는 때가 올 줄 몰랐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어른이 된 아이는 엄마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땐 아주 천천히 왔던 연말이 이젠 순식간에 돌아온다. 새해도 많이 새롭지 않다. 대신 이맘때가 되면, 아무도 없을 때면 가끔 혼잣말을 한다. '돌아올 回(회)'자처럼, 햇살 들던 그 툇마루도 좋고 아니라도 좋으니 '엄마, 언젠간 어디서든 우리 꼭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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