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사는 사람'은 겁이 없다. 여태 길거리에 나붙은 현수막과 격문을 수없이 봤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문구는 어느 노인회에서 건 "살만큼 살았다, 붙을 테면 붙어보자"였다.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는데, 두고 볼 것도 없이 오늘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결기를 무슨 수로 당해낸단 말인가.
반면, 내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두려움의 장벽을 맞닥뜨려야 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에게 통제 불가능한 미래는 큰 위협이다. 그래서 예부터 사람들은 미래를 자기 통제 안에 두고자 애를 써왔다. 재물을 쌓고 인맥을 챙기고 보험을 든다. 이런 노력이 정도껏 이뤄지면 현명한 삶의 태도라고 칭송받겠지만, 정도를 넘어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성탄 축제 중에 듣게 되는 헤로데 왕 이야기가 그렇다.
헤로데는 로마 제국 시대 유다지방을 다스렸던 분봉왕이었다. 외국인 출신으로 유대 지방을 다스리다보니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런 권력 기반의 취약성을 정략결혼으로 해소하고자 했으나 그 결과는 의심과 처형이 반복되는 가정사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방의 현자들이 찾아와 장차 새로운 왕이 되실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었다. 예수께서 선포하실 하느님 나라는 세속 권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헤로데는 그것을 분별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협할 미래 권력을 제거하고픈 권력자의 광기는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모조리 학살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가톨릭교회가 성탄 축제 기간 중에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의 모티브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헤로데 이야기가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명을 죽이는 어리석음은 결코 낯설지 않다. 가까이 우리 지역 젊은이들이 그 증인들이다. 대구 경북지방에서 1986년부터 95년까지 태어난 젊은이들의 출생성비는 심각한 불균형을 보이는데, 대략 130대 100, 그러니까 남아 130명이 태어날 때 여아는 100명이 태어난 셈이다. 자연 상태에서 105 대 100 쯤 되어야 할 출생성비가 왜 이리 기울었을까. 답은 남아선호 때문에 이뤄졌던 낙태에 있다. 1985년쯤에 널리 퍼진 초음파 성별 감별은 엄청난 수의 태아들을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죽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0년 말띠 해에는 "백말띠 여자는 팔자가 사납다"는 풍문이 돌면서 낙태를 더욱 부추겼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뒷감당을 하느라 고생 중이다. 결혼 상대가 부족해서 해외에서 신부를 구해오고, 그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살벌한 한국사회의 경쟁에서 점차 낙오될 위험에 처해 있다. 20대 남자들은 너무 치열해진 경쟁에 지친 형국이다. 어릴 적에 바람직한 남녀관계를 배울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청년들의 마음이 삭막해진다.
새해는 누가 붙였는지 모를 '황금돼지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재물을 탐하는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이름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재물로 막아보려는 부질없는 시도는 또 얼마나한 생명과 가치를 희생시킬 것인가. 새해를 열고 미래를 맞는 우리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대와 희망으로 충만하길 바란다.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 교실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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