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백화점 지하 남자화장실 두 번째 사로(사로(射路)란 사격을 하러 개별적으로 들어가는 참호를 지칭하나 칸칸이 구분된 화장실을 사격장에 비유해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당신의 케렌시아는 어디십니까?"라고 유통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모 인사에게 물었다. 뜻밖에도 화장실이다. 그것도 남의 회사 화장실이다. 여유로운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배변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공간인데다 누구의 지시나 억압도 없는 곳이라고 했다.
'케렌시아(Querencia)'라는 어원을 곱씹으니 케렌시아의 참의미를 바로 이해한 대답인 것도 같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파트 브랜드 같은 음운의 케렌시아(Querencia)를 벌써 아파트 이름으로 갖다 쓴 곳도 있지만 원래 투우장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다.

투우장에 맨 처음 들어선 싸움소는 사방이 열린 투우장에서 무대 체질이 아님을 직감하고 숨거나 쉴 곳을 찾는다고 한다. 한우나 와규(和牛)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건곤일척의 싸움을 앞둔 싸움소에만 해당되는 개념으로 풀이된다. 안타깝게도 투우장에는 숨을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정신을 잃은 싸움소가 '여긴 어디, 난 누구' 등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삶의 좌표를 설정하는 곳으로 이해하면 편하다. 몇 번 쇼하는 건 줄 알았더니 작정하고 죽이려고 덤빈다는 걸 비로소 인식하는 곳이 케렌시아다.
그러므로 사전적 의미의 케렌시아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직장 혹은 비즈니스 현장 중 한 곳이 케렌시아다. 그렇기에 남의 회사일지언정 일터와 가까운 화장실을 케렌시아라 꼽은 건 난센스가 아니다.
◆규칙은 없되 민폐도 없어야
케렌시아는 지난해를 강타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더불어 매우 개별적인 개념이다. '고향의 손맛=어머니의 숫자'이듯 케렌시아도 제각각이다.
'적기만 했을 뿐인데 마음이 편해졌다'
'사기만 했을 뿐인데 마음이 편해졌다'
'먹기만 했을 뿐인데 마음이 편해졌다'
민폐만 없다면, 규칙도 없다. 공간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사실 케렌시아는 '처음'이나 '설렘'보다 '추억'과 연결고리가 있다. 좋았던 기억의 반추에서 "맞아, 거기 그거"가 나오기 마련이다.

소울푸드가 대표적이다. 시장기에서 시작된 한 숟가락이 입 안을 케렌시아로 바꾸는 경험이다. 1980년대 "그래, 이 맛이야."의 김혜자 씨를 떠올리기 힘든 세대라면 영화 '라따뚜이(ratatouille)'의 음식평론가 안톤 이고가 라따뚜이를 먹으며 펑펑 우는 장면이 적당하다. 엄마 몰래 처음 맛봤던 믹스커피의 강렬함처럼 소울푸드의 비밀스러움을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굳이 공개할 일도 많지 않았다.
공간적 의미에 천착해 애써 찾아 나서기도 한다. 케렌시아를 찾았다며 아예 그곳에 주저앉는 경우도 있다. 제주도가 유행처럼 그랬다. 우리 지역에서도 귀농이 대체로 그런 경우였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공이 크다는 점은 인정하고서라도 적잖은 이들이 유턴했다. 씨 뿌리고 밭매는 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인간관계가 힘들어서였다는 고백이 뒤따른다.
케렌시아의 속성상 혼자만의 시간이 담보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이었다. 혼밥, 혼술, 혼행. 대개의 소확행, 케렌시아는 '혼자만의 시간'이 전제다. 그러나 농촌생활을 외따로 해선 고립만 부른다.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동시대 사람들의 케렌시아를 참고해보기도 한다. 안타까운 건 셀럽을 따라한다는 거다. 셀럽은 뭘 해도 멋있어 보인다는 점을 간과한다. '쟤들은 좋아보이는데 나는 왜'라고 자책해선 곤란하다. 셀럽은 주목받는 게 일상이다.
그런 심리를 알아채고 신문, 잡지에서는 '내 마음의 안식처' 따위의 이름을 붙여 그들만의 케렌시아를 연재하기도 한다. 그 공간을 찾아 그들과 비슷한 감성을 맛보기로 느껴보라는 의도다.
◆일터와 케렌시아의 접합점을 찾아서
'나한테는 케렌시아가 없어.'
문제될 건 없다. 케렌시아가 뭘까 한참을 고민하다 반신욕과 사우나를 반복하고서야 어느 순간 훅 하고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기도 한다.

다시 한 번 케렌시아의 원래 의미로 돌아가보자. 케렌시아는 경기장 안에 물리적으로 정해진 공간 개념이 아니다. 소가 본능적으로 피난처로 삼은 곳이다. 자기 힐링을 위한 곳이지 자아도취, '자뻑'하는 곳은 아니다.
간혹 힐링과 자뻑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곤란해진다. 힐링의 전제는 민폐 없음이지만 자뻑에는 현실 무시, 민폐가 깔려 있다. 그래서 케렌시아는 힐링, 즉 자신에게 상(賞)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적절하다.
혼자 사는 자취족들이 집에 힐링 공간을 조성하려 애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을 줘야 하는데 돌아다니면 돈이 많이 든다. 쓸데없는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혼자 술 마시고, 밥 먹는 걸 쳐다보는 눈길에 뒤통수 가려워할 필요도 없다. 나를 위로하려는 자리가 왜 둘 이상이어야 하는가. 둘 이상이면 상대방을 배려해야하니 더 불편할지 모른다.
일각에선 이런 방식을 개인주의의 확산이라고 몰아세운다. 공동체의식을 앞세운 조직문화에 저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런 확대 해석은 말의 성찬에 불과하다. 하나하나 가르치려는 '꼰대짓'은 그만 두자.

제 아무리 자취방을 아방궁으로 꾸며놔도 휴식 시간이 부족하면 말짱 '꽝'이다. 공간을 중심으로, 휴양을 중심으로 설정돼 있는 케렌시아는 물리적 시간의 부족함이라는 현실적 장애물에서 합의점을 찾게 된다.
그게 바로 케렌시아와 일터의 병행이다. '천재는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며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며 일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구호를 덧붙이며. 집보다 오히려 오랜 시간을 보내는 업무 공간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일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바꾼다. 일하는 책상을 인테리어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데스크테리어족(데스크 + 인테리어 + 族)'이다. 조명, 사진, 가구, 화분 등 소규모 인테리어 장식을 활용한다.

각자의 취향이 있으니 어떤 콘셉트로 깔아놓든 제 3자는 건들지 말고, 입대지 말아야 한다. 물론 자신의 공간이라고 마구잡이로 펼쳐놓으면 성격이 드러나니 자중하는 편이 좋다. 창조적인 업무를 추구하는 업계에서도 집단지성의 원탁보다 각자의 공간임을 물리적으로 구분해 그어주는 파티션이 사랑받는다.
'마누라랑 자식 빼고 다 바꾸라'던 주문은 애오라지 혁신적 사고를 북돋우려는 게 아니다. 변화, 나아가 인생의 전환점은 거창한 프로젝트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소소한 것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새해 첫날, 우린 무엇부터 바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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