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말이면 '교수신문'은 한 해를 돌아보며 사자성어 하나를 꼽아서 발표해왔다. 지난해를 정리하는 말은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 뭔가 하면, 짐은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다는 뜻이라 한다. 으음, 얼마나 막막한 상황일까. 이건 정치권에 대한 격려나 비판의 목소리도 되고, 여러모로 일이 많은 대학에 대한 신세한탄 같기도 하다. 풀어놓고 나니까 조금 알겠는데, 난 이런 사자성어가 있는 줄도 몰랐다. 매년 그랬다. 교수라는 분들은 왜 이리 어려운 말을 좋아할까. 사자성어라고 하면 삼한사온부터 퍼뜩 떠오르는 내 수준에서는 그 고상함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임중도원인 것 같은데.
아무튼 짐이 무겁고 길은 멀면 어찌해야 하나? 기왕이면 우리에게 답까지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 길을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나 같으면 짐을 버리고 계속 길을 가지 싶다. 왜냐하면 늘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더 쉬운 길로, 더 가볍게 가는 인생이니까 내가 이 모양이다.
작가 배성미는 적어도 나 같은 부류완 다르다. 그녀는 무거운 짐을 끝까지 이고 길을 간다. 이 말은 상징적인 비유가 아니다. 함께 일을 몇 번 하면서 내가 매번 봤던 모습이다. 그 일이란 게 애당초 작가 본인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작가는 머리로 구상만 하고 스태프가 손발이 되는 경향이 여기엔 없다. 배성미 작가가 이런 말을 들으면 '누가 사람을 부리고 싶지 않아 그러나, 내 처지가 그렇죠.'라고 겸손히 말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속으로 강한 그녀가 걷는 길이 바로 설치작가의 숙명이다.
작가는 커다란 투명상자 속에 파도가 몰아치는 이미지의 미디어아트를 설치했다. 바다 일부분을 옮겼지만 우린 드넓은 바다 그 자체를 마주한다. 파도 거품 사이로 문득 내비치는 글귀는 우리 삶이 곧 거친 물살에 이리저리 치이는 피곤한 인생임을 깨닫게 한다. 이 작품 뒤에는 난데없는 배추 한 포기와 밀대자루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건 노동의 고된 상징이다. 전시공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구조물로 바다 전체를 표현했고, 이보다 더 작고 단순한 시멘트 조각 작품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보여주는 배성미는 샘플링의 귀재가 아닐까 싶다. 설치 미술작업은 전시가 끝나면 다시 해체되는 허망한 일일 수 있다. 작가는 그걸 청소와 배추농사에 비유한다. 돌아오는 봄이면 작가가 배추 기르기 프로젝트에 힘을 실었으면 좋겠다. 예술과 노동과 삶의 일치. 멋지다.
윤규홍 (갤러리분도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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