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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흑과 백, 그리고 빨주노초파남보

천영애 대구문인협회 사무국장

언젠가부터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뉘어졌다. '모 아니면 도'여야 한다는 선명성이 정직함, 의리와도 같은 것으로 해석되면서 부터이다. 모 아니면 도 말고도 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데, 다른 경우의 수는 회색인간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 일으킨다. 중간지대에 선 사람들은 흑 쪽도 백 쪽에도 포함되지 못한다. 중간색, 즉 회색은 흑이기도 백이기도 한데 흑과 백 어느 쪽도 회색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탓이다. "세계를 흑백으로 보지 않으려 했으며, 오히려 다양한 명암이 있다고 보았다." 세계 최장수 총리 연임을 앞둔 독일 메르켈 총리의 말이다.

천영애 대구문인협회 사무국장
천영애 대구문인협회 사무국장

세계를 흑과 백으로 보는 논리는 위험하다.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를 흑과 백으로만 나누려 한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한번도 문학을 놓아본 적이 없었고, 문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을 놓아본 적이 없다. 철학도이면서 문학도이고 싶었고, 문학도이면서 철학도이고 싶었다. 그러나 철학 쪽에 가면 철학이 아니라고 거부당했고, 문학 쪽에 가면 문학이 아니라고 거절당했다. 문학을 통한 철학, 철학을 통한 문학을 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철학이거나 문학의 선명한 자리를 요구했던 것이다. 유행하는 학문 간의 융합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두 학문은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통해 자신을 더 폭넓게 드러낸다. 결국 중간에서 그만두긴 했지만 철학을 통해 문학을 해석하고 싶었던 작업은 아직도 미련으로 남아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어디로 봐도 중간지대에 서 있다. 중도를 지향하는 많은 대구경북 사람들처럼 보수 쪽에도, 그들이 경원시하는 진보 쪽에도 서지 않는다. 스스로를 '회색인간'이라고 칭한다. 회색인간이라는 부정적 느낌을 가만히 생각하다가 모던 시대를 넘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회색인간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인간이라면 어떨까.

흑과 백은 다양성을 방해한다. 이 시대의 회색인간 안에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의 다채로운 씨앗이 들어 있어, 그것은 언제라도 다양한 색으로 싹이 틀 수 있다. 경제는 보수의 파란색으로, 사회와 복지는 진보의 빨간색으로, 안보는 중도의 남색으로, 교육은 순수한 초록으로 향을 나누어보면, 내 안에도 수많은 색들이 들어 있다. '시'라는 문학 속에 발을 깊이 담그고 있으면서도 다른 학문에 여전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듯이, 그리고 그 관심들이 다양한 색으로 피워 올려지듯이 회색지대에 선 사람은 '빨주노초파남보'처럼 다양성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현대는 무엇보다 다양성의 시대가 아니던가. 패거리 문화가 여전히 성하고, 모 아니면 도를 원하는 대한민국의 기질은 메르켈 총리의 말처럼 다양한 명암을 가지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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