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의 승강기는 느려서 17층까지 43초가 걸린다. 관리실에서 주민들을 위해 승강기에 좋은 글귀를 붙이곤 한다. 한번은 "세상에서 제일 비싼 금(金)은?"이라는 퀴즈를 붙여 놓았었다. '황금' '백금' 등을 생각하며 답을 보니 '지금'이다. 지금(只今)의 '今'을 '金'으로 바꿔치기한 솜씨가 놀랍다. 지나간 과거나 불확실한 미래보다 현재가 더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중심의 이러한 관(觀)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 잘 반영되어 있다. 빅 브라더(Big Brother)가 지배하는 당의 슬로건인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말 속에 잘 압축되어 있다. 여기서 '지배한다'는 말은 '조절·조작한다'(control)는 말을 의역한 것인데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조절'조작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기록국 직원이다. 빅 브라더가 공언한 약속이 실현되지 못했을 때 약속을 했던 과거의 기록(신문, 서적, 사진 등)을 모조리 찾아 과거의 약속과 현재가 일치하도록 조작하는 것이 임무이다.
가령 내년도 초콜릿 배급량을 줄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해가 바뀌고 4월쯤에 30그램을 20그램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고 치자. 그러면 '줄이지 않겠다'는 작년의 기록을 모두 찾아 '내년 4월경엔 배급량을 20그램으로 줄인다'라고 조작하여 과거를 현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빅 브라더는 공약을 완벽하게 지켜내는 지도자로 우상화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황보영조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기억의 정치와 역사'에서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고, 그 기억마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바뀌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보면 역사 바로 세우기와 역사 조작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현재 권력이 완벽한 도덕성을 갖추지 않았다면 조작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에 황보 교수의 지적은 긴 여운을 남긴다.
이처럼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미화 또는 폄하할 수도 있다는 것은 문제다. 미화나 폄하의 대상이 개인의 주관적인 호불호에 따라 달라지고 개인의 호불호는 개인의 이념, 출신 지역 및 계층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이념, 지역 및 계층 간에 생각의 편차가 큰 편이라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우호적인 사람이나 단체의 과(過)는 무조건 감싸며 편들고 공(功)은 역사적인 업적이라며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적대적인 사람이나 단체의 공은 무조건 깎아내리고 과는 부풀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무조건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문제다.
새해는 왔고 무술년은 기억 공간에 저장되었다. 과거를 재단할 수 있는 힘을 현재가 지녔지만 현재도 곧 과거가 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현재를 사는 우리는 현재가 과거가 된 후 그때의 현재도 우리를 재평가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념, 지역 및 계층에 바탕을 둔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어떤 것을 미화하거나 폄하하는 일이 새해엔 없길 바란다. 잘하는 정책엔 박수를 보내고 잘못하는 정책엔 회초리를 드는 객관적 대한민국 시민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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