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야간 통행금지

매일 밤 12시가 되면 대구 하늘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처음에는 낮게 나중에는 고음의 큰 소리가 된다. 그 소리가 나면 거리에는 사람이나 말 구루마나 자동차 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음 날 새벽 4시가 되면 다시 인적(人跡)이 나타난다. 소리 하나에 모든 게 없어진다. 이것은 커다란 마술이다.

해방 되던 해 9월 7일 부터 맥아더 포고령에 의해 전국에 '통행금지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의 정식명칭은 '야간통행금지'였지만 보통은 '야통' 혹은 '통금'이라고 불렀다. 사이렌이 울렸는데도 길거리를 다니면 파출소에 잡혀간다. 일정 인원이 모이면 경찰서로 데려가 보호실에 대기시켰다가 아침에 분류를 한다. 통금 시작 후 30분 이내 잡힌 사람은 훈계방면이 되고 그 시간 이후 적발된 사람은 즉결 재판소에 가서 재판을 받게 된다.

태평양 전쟁 동안 통금에 훈련된 시민들은 별 불평도 않고 받아 들였다. 밤 12시 넘어 도착하는 버스나 열차 승객은 손목에 '통행증'이라는 도장을 찍어주어 별 문제없이 집에 갈 수 있게 했다. 치안이 안정되자 제주도와 울릉도는 1964년, 충청북도는 1965년, 도서지역은 1966년에 통금이 해제되었다. 고속도로 주행 차와 석탄, 시멘트 등의 산업용 자재 운반용 자동차나 생필품 트럭 등도 단속을 하지 않았다. 선량한 시민들은 통금에 걸릴까봐 12시가 다가오면 안절부절 못하고 조바심을 쳤지만 오입 장이들은 오히려 이 제도를 역이용했다. "친구 아버지가 죽었다." "과장 할머니가 죽었다"며 초상집에서 밤샘한다는 핑계도 하루 이틀이지 더 이상 남을 죽일 수 없을 때 잔업하다 통금 걸려 귀가를 못하겠다며 당당하게 거짓말하고 외박을 하였다.

통금은 조선시대부터 시작한다. 태종 때부터 오후 8시(초경 3점)부터 다음 날 새벽 4시 30분(오경 3점)까지 통금을 하였다. 통금 시작을 '인정(人定)'이라 불렀으며 쇠북을 28회 치고, 해금은 '파루(罷漏)'라고 하며 쇠북을 33회쳤다. 세종 때부터 완화가 되어 오후 9시(이경)부터 익일 오전 3시(오경)까지로 단축을 시켜주었다. 이 시절 통금위반자는 경무소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벌을 받는데 초경에 잡힌 사람은 곤장 10대, 이경 이후 단속된 사람은 20대를 맞고 집에 갔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대구 동성로는 환희와 광란의 거리가 된다. 통금이 없는 밤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생일과는 별 관계도 없는 젊은이들이지만 행동을 억압하는 규제가 없어지자 자유의 밤공기를 만끽하기 위해 동성로, 향촌동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어 밤새껏 그들의 축제를 즐겼다.

하늘이 만든 천둥 번개는 피뢰침을 만들어 공포에서 벗어난 인간이 스스로 만든 사이렌 소리는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고 지시를 따랐다. 해방 후의 혼란과 한국 전쟁의 소란 그리고 군사독재의 횡포도 끝나며 밤하늘의 사이렌도 살아졌다.

딱 한군데 경기도 파주군 군내면 조산리에는 아직 통금이 남아있다. 이 마을은 비무장지대에 위치하는 대성동 마을로 속칭 '자유의 마을'이다. 이곳의 민사, 행정 및 구제 사업은 파주시가 아니고 유엔군 사령부에서 관리를 한다. 국방, 납세의 의무가 면제된 상태로 212명이 살고 있다. 밤의 자유를 억제 받는 대신 낮의 자유를 누리고 사는 셈이다. 대성동 마을 사람들이 자유인인가? 마을 밖 사람들이 자유인인가? 야통 사이렌이 살아진 대구의 늦은 밤거리를 걸으며 가져 보는 의문이다.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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