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서울 33, 大慶 33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그 소년은 우리 교인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 이갑성은 1903년 6월 개신교 세례를 받고 미국인 선교사 부해리(헨리 브르엔)로부터 소년야구단에서 야구를 배웠고, 부해리의 한국말 배우기 연습 상대가 됐다. 그래서 부해리는 이갑성을 기억,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부해리의 기대처럼 뒷날 이갑성은 걸맞은 일을 했다. 1919년 최연소 3·1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경상도를 맡아 2월부터 대구·부산·마산을 오가는 심부름과 연락책의 역할을 했다. 비록 인물 영입은 실패했으나 특히 대구경북 만세운동의 밑거름을 뿌렸다.

그의 서울 방은 민족대표들의 밀회 장소였고, 3월 만세운동 투옥 등 1945년 광복의 바로 그해까지 8차례 9년 넘게 감옥을 드나들었다. 1953년 이후로는 33인의 유일 생존 대표로 1965년부터 광복회 1·2대 회장까지 지냈다.

100년 전, 이갑성의 활동과 자극을 계기로 대구경북 사람들은 서울과 평양보다 늦었지만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5월까지 장터, 묘지 부근, 산 위에 이르기까지 고을마다 독립과 만세를 외쳤고 희생을 치렀다.

특히 대구 계성학생 등 11명을 중심으로 그해 4월 꾸린 비밀조직 혜성단은 돋보였다. 경찰과 군대, 그 끄나풀인 보조원·밀정들의 불을 켠 감시망 속 11가지 2천 매 넘는 인쇄물을 만들고 돌렸다. 만주 연락책을 둘 만큼 기개 넘친 큰 틀의 독립운동 밑그림도 그렸다.

결국 만세시위로 대구에서만 1명 사망, 102명이 기소되는 희생이 있었지만 대구는 독립운동가 양성소가 됐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까지 뭇 사상과 이념을 수용한 대구는 젊은이가 독립운동 정신으로 무장하는 도시였고, 학생 비밀결사는 그치지 않았고 광복 뒤의 학생 의거 바탕이 됐다.

31운동 100주년이 한 달 남았다. 대구경북 33개 지자체마다 기념 행사 준비로 그때처럼 2월은 바쁜 달이다. 나라 안팎으로 힘든 지금, 100년 전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외친 것처럼 대구경북 33개 지자체 대표와 시도민이 한뜻으로 지방식민주의에서 독립, 지역과 나라가 함께 사는 앞길을 여는 3·1절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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