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망국의 옹주, 덕혜옹주

올해는 3. 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
고종의 승하(1월 21일)가 있었던 해이기도
덕혜옹주 개인에게는 비극적인 삶의 출발점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문화재청은 지난달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가 한글로 쓴 친필 자료가 미국에서 환수되었음을 크게 알렸다. 덕온공주는 조선 23대 왕인 순조의 셋째 딸로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칭하는 '공주'라는 점에서는 마지막 공주가 된다. 그런데 왕과 후궁 소생의 딸을 칭하는 '옹주'까지 포함하면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1912~1989)를 마지막 공주라 할 수 있다.

1912년 5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덕수궁 함녕전에 있던 고종은 아기의 울음소리에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았다. 환갑을 맞은 해에 딸이 태어난 것이다. 귀인 양씨 소생의 덕혜다. 고종은 덕혜를 끔찍이 아꼈다. 늘 딸을 찾았으며,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아기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1916년 4월에는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 유치원을 만들고, 딸의 동년배 5, 6명을 함께 다니게 했다.

그러나 부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했다. '황제의 혀와 치아가 다 타 없어지고 온몸이 퉁퉁 부어 오른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기록에서 보듯 일제의 독살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고종의 승하는 여덟 살 덕혜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1921년 4월 덕혜는 일본 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했고, 일제의 압박 속에 1925년 3월에는 낯선 땅 동경으로 향했다. 동경의 여자학습원에 다니던 시절 덕혜는 늘 보온병을 들고 다녔고 그 안에 있는 물만 마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이 독살이라고 믿은 덕혜는 늘 독살의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1926년 오빠 순종의 죽음과 1929년 생모 양씨의 죽음이 이어지면서 고국에 의지할 인물 없이 이국 땅 일본에서 덕혜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녀의 나이 20세 때인 1931년 5월 8일에는 일제의 정략결혼 정책에 의해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했다. 일본인 아내를 맞은 오빠 영친왕과 같은 운명을 밟은 것이다.

결혼 1년 후 딸 정혜(正惠)를 낳으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지만, 망국의 옹주로 겪은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인지 조현병이 찾아왔다. 남편은 집에서 간병을 하다 1946년 정신병원으로 덕혜를 옮겼고, 두 사람은 1955년 합의 이혼에 이르렀다.

덕혜는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고국 궁궐에 가기 원했다. 이 무렵 서울신문 김을한 기자는 그녀의 귀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왕실의 상징인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2년 1월 26일, 51세의 나이가 된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37년 만에 맛보는 감격이었다. 당시 언론은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산천이 낯선 외국으로 끌려간 데다 왜인과 뜻하지 않은 강제 결혼으로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그녀의 아픔을 대변하였다.

귀국 후 그녀가 머물렀던 곳은 서울대병원. 병원에서의 요양도 큰 차도가 없자 1967년 거처를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옮겼다. 낙선재에는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가 거처하면서 덕혜와 말년을 함께 보냈다. 조선 왕실 마지막 여인들은 운명도 같은 해에 했다. 1989년 4월 21일 덕혜가 세상을 떠난 지 9일 후에 이방자 여사도 그녀를 따라갔다.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되는 해다. 고종의 승하는 덕혜옹주 개인에게는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아가는 비극적인 삶의 출발점이었지만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기도 했다. 망국의 공주로 살아간 덕혜옹주의 삶, 그리고 3·1운동의 함성이 메아리쳤던 100년 전 역사를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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