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창] 두 가지의 타락

이성환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

이성환 계명대 교수
이성환 계명대 교수

박근혜 정부 입맛 맞춘 양승태 사단

日 배상 뒤집을 궁리하며 판결 지연

이래저래 만신창이 된 한국 사법부

日, '야만적'이라 해도 할 말 있겠나

1891년 5월 11일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 참석차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에 일본을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태자의 경비를 맡고 있던 '쓰다 산죠'라는 경찰이 차고 있던 칼로 황태자를 찔렀다. 우측 머리에 9㎝의 상처를 입은 황태자는 평생 두통에 시달렸다. 그는 3년 후 황제로 즉위했다.

사건 다음 날 천황은 황태자가 치료를 받고 있는 호텔에서, 일주일 후에는 그가 머물고 있는 군함에서 사죄했다. 아직 소국이었던 일본은 당시 세계 최대의 대륙 세력으로 불리던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국가 존망의 위기였다.

국민들은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학교는 휴교를 하고 전국의 신사와 절에서는 황태자의 쾌유를 비는 기도회가 열렸다. 심지어 생선 가게 점원인 하다케야마 류코는 황태자에게 '죽음으로 사죄한다'는 글을 보내고 교토부 청사 앞에서 자결하기도 했다.

주일러시아 대사는 범인의 처형을 요구했고, 일본 정부도 사형 방침을 밝혔다. 문제는 형법에 일본 황실에 위해를 가한 자(대역죄)는 사형시키도록 되어 있으나, 니콜라이 2세는 일본 황족이 아니었다. 정부는 대역죄를 적용해 사형 판결을 내리도록 고지마 고래카타 대심원장(대법원장)을 압박했다. "법을 엄히 지켜 나라가 망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고지마는 "형법에 없는 죄명을 적용하여 처벌하면 일본은 법치주의를 모르는 야만국이 된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헌법 제정자이며 귀족원 의장인 이토 히로부미는 계엄령을 선포해서 그를 처형하자고 했다.

정부 대신 중에는 재판 없이 즉시 납치, 총살하자는 자도 있었다. 러시아의 보복을 두려워한 행동들이었다. 그럼에도 산죠는 살인미수죄를 적용받아 무기징역에 처해졌다(두 달 후 폐렴으로 옥사). 러시아는 보복하지 않았고, 사건 당시 산죠 검거에 도움을 준 일본인 인력거꾼에게는 상금과 평생 연금을 제공했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도 고지마 대심원장은 사법부의 독립을 지켰다. 그의 판결은 국제적으로 일본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높였고, 문명국가 일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3년 후 일본은 니콜라이 2세의 제정 러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했다. 사법부 독립의 전통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현재 일본 헌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특별재판소의 설치를 금지해, 다른 권력의 재판 개입을 막고 있다. 대법원 판사는 10년마다 투표로 국민의 신임을 받아야 하며, 법률 전문가가 아닌 유식자도 대법관에 임명될 수 있다.

삼권분립과 법치주의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프랑스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두 가지의 타락이 있다. 국민이 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와 법 때문에 국민이 타락하는 경우이다"고 했다. 법을 해석하고 판단하여 적용하는 사법부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법부 및 법관의 양심의 독립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법복이 검은 이유는 어떤 색깔에도 물들지 말라는 뜻이다. 일본은 한국 법원이 강제징용 판결을 잘못하면 "한일 관계가 파탄 날 것"이라 사전 경고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나라 망신이 안 되도록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양승태 사법부는 기민하게 한국과 일본 정부에 발 맞추려 했다. 사법부의 독립을 포기한 '야만'이다.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하급심의 판결을 뒤집을 궁리를 하면서 판결을 계속 미뤘다. 소송 당사자들의 사망을 기다리는 듯했다.

한국 사법부가 이래저래 만신창이다. '야만'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일본의 반발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기 나라의 법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한국 사법부의 '야만성'을 엿본 것일까. 자기만의 논리에 젖어있는 섬나라 근성일까. 일찍이 사법의 독립은 근대국가 문명의 척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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