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12월 28일 영면하신 이기홍선생님은 1926년 2월 5일 영천군 금호면 냉천동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금호초등학교 1학년 담임은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이었고, 바로 위 형님은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였고, 자형이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가였다. 이러한 음악적 환경으로 경주중학교 재학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서울대 음대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하여 동기생 양해엽과 함께 박민종(1918∼2006)선생을 사사하였다. 졸업 후 해군정훈음악대(악장 박민종)에서 제1바이올린으로 2년간 활동한 선생님은 6・25전쟁으로 대구로 내려와 대구여중, 영남고, 능인고, 경북여고, 대구공고에서 음악교사로 지내면서 아울러 바이올린 개인지도를 하였다.
선생님은 향토 1세대 바이올린연주가이며 오케스트라의 창시자이다. 1956년 6월 자신의 바이올린 문하생을 중심으로 대구현악회를 조직하여 청구대 강당에서 공연함으로써 본격적인 대구지역 현악기의 울림이 시작되었다. 이 단체는 이듬해 2군군악대 관악기 연주자의 협조로 대구교향악단으로 확대됐으며, 1963년에는 대구방송교향악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마침내 1964년에는 대구시립교향악단으로 창단되어 초대 상임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 대구의 실내악은 불모지였기 때문에 더욱 선생님의 업적이 위대하다. 한편 대구음악가회 회원을 비롯하여, 하영수(한일미유 사장), 이효상(국회의장), 김준성(대구은행장), 한남석(대구방송국장), 유치환(예총대구지부장), 박경원(경북도지사), 강원채(대구시장) 등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러한 분들을 직접 만나 이해 및 설득시키고 도움을 요청한 결과임이 더욱 놀랍다. 오직 손과 발로 뛰어 일구어낸 옥토로 비견될 수 있겠다.
선생님은 1970년에 개설된 영남대 음악과에 출강하였다. 필자는 1971년 전국음악경연대회 관현악 부문에서 전체 특상(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다른 대학으로 진학하지 말고 영남대에 입학하면 4년간 전면장학생은 물론이고 교통비까지 지급할 수 있다고 입학을 권유하였다. 그래서 입학한 나는 당시 선생님이 맡은 합주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듯이, 지금 선생님이 그립다.
말 수가 적은 선생님은 음악적 내용이 궁금하여 문의할 때마다 친절하게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씀하시는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큰소리로 꾸짖거나 지적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필자가 1988년부터 대구음악사연구를 하면서 선생님이 보관한 사진자료, 포스터, 팸플릿 등 여러 가지 화상학적 자료들을 카메라에 담은 적이 있다. 앞으로 이러한 자료를 아카이빙 해야 함이 대구시의 과제라 생각한다.
바이올린 연주가 손진헌(대구현악회 단원), 이영애, 구경자, 강건, 심상균(전 영남대 교수), 강효(세종솔로이스츠 예술감독), 정덕성(전 서울시향 단원), 임석영(전 대구시향 단원), 김문기, 이철범, 이영화, 윤경호, 유남옥 등이 선생님의 제자들이다. 차후 대구음악협회나 대구시향에서의 추모음악회 및 업적을 기리는 주기적인 행사가 있기를 기다려 본다.
손태룡 한국음악문헌학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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