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포 이야기] ⑧ 도장 인생 50여 년 월성인업사 유병태 씨

도장 새기는 일이 천직이라고 말하고 있는 유병태 씨.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도장 새기는 일이 천직이라고 말하고 있는 유병태 씨.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중요한 서류에는 이름을 쓰고 그 옆이나 밑에 반드시 도장을 찍어야 했다. 그러나 요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기계로 간단하게 도장을 새긴다. 도장을 새겨온 지 53년 경력의 유병태(71) 씨는 아직도 손작업을 고집한다. 유 씨는 "자신을 증명하거나 서약할 때, 그리고 거래할 때 주로 도장을 찍는다. 그러니까 도장은 신분증명과 약속,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도장은 신분증명과 약속, 두 가지 뜻 담겨져"

경주역 앞 성동시장 한 켠에 자리잡은 '월성인업사'. 두 평 남짓한 가게엔 자그마한 작업대와 의자, 그리고 도장 새길 때 재료를 고정시키는 조각대와 칼 몇 개가 전부다. 모두 40년이 넘은 것으로 새카만 손때가 잔뜩 묻어 있다. 옆 네모 판자에는 '도장'이라는 큼지막한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이 유병태(71)씨의 일자리다.

유 씨는 이곳에서 오후 3시까지 손때 묻은 조각도로 직경 15㎜ 안의 우주에 혼을 담고 있다. 1966년부터 도장 새기는 일을 했으니 벌써 50년이 넘었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머리는 하얗게 빛이 바랬고 굳은살이 박힌 손은 투박하다. 하지만 안경 너머 눈동자만은 또렷하다.

그의 손에 잡힌 조각칼이 지나갈 때마다 새 생명이 태어난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그의 칼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람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질 때 비로소 그의 혼이 밴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유 씨는 "도장 새기는 일은 곧 신분증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도장에 새기는 글씨는 '좌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서 좌우가 뒤바뀐 모양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필력으로는 예술적인 글씨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몇십 년을 노력해도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런 면에서 유 씨는 칼과 붓, 전·서각에 두루 능해야 하는 도장가로서 조건을 두루 갖췄다.

유 씨는 "도장은 이름자의 획수에 따라 印(인), 章(장), 信(신) 중 어느 첨자를 쓸지, 어떤 서체를 쓰고, 테두리와 글씨 중 무엇을 가늘고 굵게 할 것인지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손님의 인격이 제 손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싸고 편리하게 컴퓨터를 이용해 기계 도장을 새기는 게 대세인 요즘에도 유 씨는 직접 수조각으로 새기는 '손도장'만을 고집하고 있다. 도장이 기구이기 이전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편하기는 한데 예술적 운치와 인장가의 혼이 담기지 않은 도장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도장은 찍으면 찍을수록 멋이 스며 나온다. 제 도장 덕에 일이 잘 풀렸다며 다시 찾아주시는 분들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유 씨는 오늘도 작은 우주 속에 혼신의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40여 년간 사용해온 유 씨의 도장 새기는 기구들. 손때가 잔뜩 묻었다.
40여 년간 사용해온 유 씨의 도장 새기는 기구들. 손때가 잔뜩 묻었다.

◆오른손 아닌 왼손으로 사람 이름 새겨

경주 산내면에서 태어난 유 씨는 다섯 살에 겪은 소아마비 때문에 오른손과 오른쪽 다리가 부자연스럽다.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웃집에 살던 마을 이장이 칼과 도장 재료 몇 개를 가져다주며 "기술만 있으면 밥 먹고 살 수 있다. 여기에 도장 한 번 새겨봐라"고 권했다. 이것 아니면 끝이란 심정으로 작업에 매달렸다. 결국 도장 새기는 일을 배웠다.

면소재지에 가게를 열었다. 주위 분의 도움으로 가게는 잘 됐다. 어느날, 또 다른 일이 마음에 들어왔다. 사람의 이름을 새겨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담아주는 사진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구식 결혼을 하는 이들이 많아 사진의뢰가 많았다.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사진업이 시들해졌다. 사진관을 아내에게 맡기고 경주 시내로 나왔다. 1978년 봄이었다.

형님 친구 배려로 경주역 앞 성동시장 한쪽에 도장가게를 차렸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마침 도장업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지금에야 서명 하나로 끝나지만 당시엔 사람들 모두 근사한 인감도장 하나쯤은 있어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일이 잘 돼 솜씨 좋은 사람을 고용해야 할 만큼 일이 밀렸다.

자리를 잡아갈 즈음, 일이 터졌다.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사람이 보증을 부탁해왔다. 망설임 없이 인감도장을 그의 손에 쥐여줘 보냈다. 5천여만원을 고스란히 갚아야 했다. IMF 때 이자가 높아 더 힘들었다. 내 돈으로 갚고, 돈을 빌려서 또 갚고 이자에 이자를 물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다. "당시 많이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일도 줄었다. 가끔 벼락 맞은 대추나무나 상아 도장을 의뢰하는 이도 있지만 하나에 5천원하는 막도장이 대부분이다. 취재 도중에도 막도장을 새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굽어서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으로 도장을 고정하면 왼손이 마치 기계처럼 척척 움직이며 글씨를 새겼다. 2, 3분 남짓 걸렸다

전통시장 길가에 있는 유 씨 가게는 소란스럽다. 그러나 유 씨는 "칼을 잡고 있으면 고요해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나무의 결만 보인다. 이 일은 집중할 수 없으면 한 자도 새길 수 없는 작업"이라고 했다.

유 씨는 도장을 새기는 작업이 보람 있고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다. 또 남이 보기엔 불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도장 새기는 일이 천직인 것 같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도장 새기는 일을 하라고 한 마을 이장님이 고맙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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