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화가 이중섭(李仲燮·1916~ 1956)이 대구에 머문 기간은 1955년 2월 24일부터 1955년 8월 26일까지 6개월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대구와의 특별한 인연을 맺었으니 생애 마지막 개인전이 열렸고, 작품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 '낙원의 아이들' '신문을 보는 사람들' 3점의 은지화가 맥타가트(Mctaggrt)에 의해 세계적인 미술관 '모마'(MoMA) 즉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면서 그의 명성이 서양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 곳이다.
그럼에도 많은 대구시민들은 경복여관에 묵으며 전시회 준비를 했거나 백록다방에서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거나 정신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서울로 간 것 정도로 알고 있다.
이중섭의 내구(來邱)는 구상의 권유였다고 한다. 서울 미도파화랑의 전시회가 만족스럽지 못하자 대구에서 만회하려 했다고 한다.
소설가 최태응, 시인 구상, 화가 정점식 등의 노력과 미국 공보원장 맥타가트의 장소 제공으로 1955년 4월 11일부터 16일까지 6일간 개인전이 열렸다. 이때 맥타가트는 5점의 그림을 구입하여 '싸우는 소' '환희' 2점은 본인이 소장하고 3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모마에 기증했다.
이 전시회에는 '봄' '아동' '새벽' '달밤' '길떠나는 가족' '닭' '달밤 B' '고기잡이' '그림 조각' '무제 A' '피란민의 첫눈' '바닷가' '실제'(失題), '두 마리 소' '소'(素), '무제' '동'(童), '옛이야기' '씨름하는 소' '제주도' '동심' '무제 C' '씨름하는 소 B' '왜관 풍경 A' '왜관 풍경 B' '이조 때 초롱' 등 26점과 그 이외 대구에서 그린 10여 점, 서울에서 가져온 20여 점을 합하여 모두 60여 점을 출품했다.
곧바로 상경할 예정이었으나 외상 그림값을 수금해야 했고, 지친 심신을 추슬러야 했다. 왜관 구상 집과 태전동 최태응 집을 왕래했다. 그러나 왜관에서의 활동은 '왜관 성당 부근' '구상 네 가족' 등 5점의 그림을 통해 드러나 있는 데 비해 태전동의 생활은 특정할 만한 그림도 확인되지 아니하고, 마을 이름도 매천동(梅川洞)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서규수(대구시 중국어문화해설사)의 그동안의 연구와 배석운(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 도성탁(대구보건대 교수), 필자 등이 최태응의 아들 최수철의 학적부(매천초등학교 소장)를 살펴보고 현장을 확인한 바 이중섭이 머물렀던 최태응 집은 처음은 북구 학정로 82-52이고, 두 번째 집은 같은 학정로 102였다. 이중섭은 두 번째 최태응 집에서 더부살이했다.
북구 태전동은 그때와 달리 상전벽해로 변했다. 최태응과 이중섭이 살던 집도 헐리고 가끔 그림을 그렸다는 연못은 고층 아파트단지가 되었다. 제주도가 이중섭미술관을 짓고 각 도시가 순회전을 앞다투어 유치해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데 비해 대구는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
국민화가 이중섭과 한국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 최태응을 다시 대구(북구 태전동)로 불러들이는 작업을 시도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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