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귀촌한담]학계마을 할머니

전영평 대구대 명예교수
전영평 대구대 명예교수

마을회관은 할머니 놀이터다. 할아버지는 아랫마을 경로당에 가신다. 남녀 구분이 분명히 느껴지는 산골이다. 내 여친은 할머니들이다. 덕분에 마을회관 단골손님이 됐다. 10여 분 되는 할머니 그룹엔 군대 내무반 같은 서열이 있다. 80세 되신 화산댁은 내무반장이고, 88세 되신 사천댁은 최고참 병장이시다. 마을회관 운영은 지도자급 할머니의 권위와 상호 합의에 따른다. 할머니의 체면과 권위는 자녀, 재산, 열성에 달려있다. 자손들이 드리는 금일봉과 음식은 할머니 체통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 경로잔치를 해마다 열고 돼지나 염소를 잡는다. 자연 촌락의 전통이 남아 있는 좋은 마을이다.

할머니들에겐 남성 존중 습관이 살아 있다.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뒷말이 무성하다. 남자가 왜 부엌에 드나드냐고. 식사를 같이할 경우 남자는 윗자리에 앉으라신다. 처음엔 참 불편했었다. 변변한 농사터가 없었던 할머니들은 삯일을 해서 자식을 교육시키셨단다. 억세고 희생적인 할머니의 기품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억센 기풍은 밭두렁은 물론 도로 옆 잡초밭까지 그냥 두지 않는다. 덕분에 산속에도 노는 밭이 없다. 강인한 정신력이야말로 나이를 잊고 행복을 느끼게 하는 보약임을 실감한다.

아무래도 할머니들은 병원에 자주 가신다. 하지만 결코 농사일을 놓지 않으신다. 호미 하나로 한두 마지기 농사는 거뜬하다. 88세 사천댁도 300평 남짓 밭을 지으시고 무거운 농약통을 거뜬히 짊어지신다.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다. 제주 해녀 할머니의 산골 버전인가 싶다. 할머니는 밭농사가 힘에 부치지만 그만큼 행복한 일도 없다고 하신다. 농사는 신진대사를 돕고, 정신 집중, 재배와 수확의 기쁨, 용돈 창출에 기여하는 즐거운 사업이 아닐 수 없다.

"농사가 즐겁지 않으면 우째 농사를 짓겠노." 할머니 말씀이다. "씻고 누우면 임금도 부럽지 않다." 할아버지 말씀이다. 나는 궁금하다. 할아버지는 씻고 누우면 되지만, 할머니는 씻도 못하고 저녁밥해야 되는 거 아이가? 할머니는 신랑 밥해준다시며 회관을 나선다. 사뭇 뿌듯한 얼굴이시다.

전영평 대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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